▲ 이덕훈 한남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그가 남긴 무수한 소문과 전설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무사시의 일화가 바로 간류지마(嚴流島: 현재의 야마구치현(山口縣) 시모노세키시(下關市) 근처의 무인도) 에서 벌어진 당대최고의 검객인 사사키고지로와의 대결이다. 이는 규슈의 부젠 오쿠라번의 다이묘인 다다오키의 명으로 무사시와 코지로의 결투가 성사된다.
유리한 자리를 잡기 위해 미리 도착해서 준비하고 있던 코지로를 상대로, 무사시는 철저한 계산속에 일부러 1시진(2시간) 늦게 나타나 코지로를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두 시간이 지나가자 코지로의 투지가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체력고갈과 함께 집중력저하로 초조해졌다.
해가 뜨면서 선점하고 있던 코지로의 위치가 불리하게 바뀌는 때를 노리고, 코지로의 장검(약95cm) 에 맞서 (과감히 쌍검을 버리고) 배안에서 못쓰는 노를 깎아 만든 목검(140cm)을 들고 늦게 나타나자 고지로가 자기를 무시한 것에 대한 흥분을 참지못하고 칼을 뽑고 무사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사시의 목검이 그의 머리를 먼저 부수고 늑골을 내려쳐 고지로가 쓰러졌다.
간류섬의 대결을 보고 외국에서는 비겁하고 교활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으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스포츠가 아닌 사활이 걸린 진검승부에서의 생존전법으로서 존경하고 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57세인 1640년 8월 히고(肥後) 번의 초대번주인 호소가와 타다도시(細川忠利 )의 초청으로 구마모토를 마지막 인생의 정착지로 생각하고 입성하였다. 구마모토에 입성 직후 타다도시의 명으로 우지이미츠나리(雲林院光成)와의 비밀의 어전시합이 열렸는데 무사시의 뛰어난 검술에 타다도시는 감명받아 번전체를 무사시의 니텐이치류(二天一流)의 문하생으로 만든다. 그리고 5년뒤인 62세로 다다미 위에서 죽기 한 달 전에 탈고한 ‘고린쇼(五輪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병법서중 하나이다.
그리고 또하나의 무사도와 관련된 유명한 사람이 있는데 호소카와 가라시아라는 여성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참모였던 아케치 미츠히데(明智 光秀)의 3녀로 태어난 가라시아는 오다노부나가의 주선으로 호소카와 타다요키와 결혼을 하지만 그녀가 19세인 1582년에 부친 미츠히데의 반역(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역신의 딸로 취급받아 은폐생활을 강요당한다. 1586년 예수회의 세스피데스 신부에 의해 영세를 받아 자기의 힘든 처지를 벗어나기 위한 신앙으로서 카톨릭을 택했지만 남편 타다요키는 알지 못했다.
1600년 일본천하를 다투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오사카에 있는 호소카와 야시키(별가)에 이시다미스나리에 의해 인질취급을 받자 자살을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이기 때문에 그녀는 고민하지만 무사의 딸이며 부인인 그녀는 일본적사고로 호소카와 가문을 위해 자살을 한다. 물론 할복은 아니었지만 외국에서는 가문을 위해 자살한 가라시아는 무사도정신으로 죽음을 택했다하여 비운의 가라시아로 평가하여 그녀에 대한 오페라가 있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
구마모토성은 지금도 한국 사람이 제일 많이 방문하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가토기요마사,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미야모토무사시의 3인의 무사도와 여성이지만 죽음으로서 가문을 지킨 호소카와 가라시아의 전설적 이야기와 무사적 사고를 한국관광객들도 되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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