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어둠에 희망의 빛이 돼 줄께

  • 문화
  • 영화/비디오

당신의 어둠에 희망의 빛이 돼 줄께

■블랙 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 출연: 아미타브 밧찬, 라니 무커르지, 아예사 카푸르.

  • 승인 2009-08-27 15:34
  • 신문게재 2009-08-28 12면
  • 안순택 기자안순택 기자

 <줄거리>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8살 소녀 미셸 맥널리. 그녀는 짐승처럼 날뛰며 가족 또한 그녀를 짐승처럼 대한다. 그러던 미셸에게 아주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다. ‘교사’가 아니라 ‘마법사’라고 말하는 데브라지 사하이다. 사하이는 강인한 정신력과 집요한 노력으로 미셸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어디서 들은 듯 익숙한 이야기다. 그렇다. 헬렌 켈러와 설리번 선생님의 이야기다.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큰 병을 앓고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헬렌 켈러.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고 주위 물건을 마구 집어던지는 짐승 같던 헬렌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친 사람이 설리번 선생님이다.

 설리번이 헬렌의 손바닥에 물을 부어 물의 감촉을 느끼게 하곤 손바닥에 ‘water’라고 수백 번을 써주고, 헬렌의 손을 자신의 목과 입에 가져다대고는 입모양과 목의 떨림을 느끼게 해 ‘워터’라는 단어가 어떻게 발음되는지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익히 아는 이야기다.

 ‘블랙’은 이 익숙한 19세기 미국의 감동실화를 거의 그대로 장소만 인도로 옮겨 재현한다.

 헬렌의 이야기와 ‘블랙’이 갈라지는 지점은 선생님 사하이가 알츠하이머병을 앓으면서부터다. 미셸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사하이는 미셸에게 알리지 않은 채 그녀 곁을 떠난다. 미셸은 사하이 선생님을 애타게 수소문하는 한편 그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산제이 릴라 반살리 감독은 헬렌 켈러의 삶에 경의를 표하지만 초점을 미셸보다 사하이에 맞춘다. 단순한 인간승리 드라마에서 벗어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말하려 애쓴다.

 선생님이 남자인 것도 그래서다. 미셸의 장애와 사하이의 알츠하이머병, 상대방의 ‘어둠’에 환한 빛을 주려는 두 사람의 노력은 아가페적 사랑에 가깝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 관계라 할지라도 남녀 간의 연정이라는 굴레는 예외가 아니다. 특히 미셸이 성숙해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에로스가 파고들 여지가 커진다.


‘블랙’은 이런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아시스’처럼 솔직담백하진 않지만, 미셸이 사하이에게 키스를 원하는 장면은 장애인의 성적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으로 이 영화가 가진 또 다른 미덕이라 할 만하다.

 영화에서 미셸은 사하이가 자신에 대한 무한한 애정 때문에 “스승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그 일이 있은 뒤 사하이가 떠나는 것은 알츠하이머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괴로움 때문은 아닐 것인가. ‘블랙’을 2005년 최고의 영화 5위로 꼽은 ‘타임’이 “이 영화는 궁극적인 발리우드 러브스토리”라고 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굉장히 익숙한 이야기, 뻔한 소재-알츠하이머병이 좀 특별하다고 해봤자 기억상실은 우리 막장드라마의 단골소재가 아니던가-임에도 ‘블랙’은 진한 여운을 선사한다.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건 뭐니뭐니 해도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덕분이다.

 암흑의 세상에서 야수처럼 날뛰다 문득 세상과 대화하는 법을 깨닫는 어린 미셸 역의 아예사 카푸르는 처음 해본 연기라는 게 믿기기 않을 정도로 어둠에 갇힌 소녀의 절망과 희망을 절절하게 그려낸다.

성장한 미셸 역의 라니 무커르지 또한 자기보다 먼저 결혼한 동생에 대한 묘한 질투, 여자로서의 감정을 느꼈을 때의 당혹스러움, 사하이가 떠났을 때의 절망 등 ‘장애인 미셸’뿐 아니라 ‘인간 미셸’의 내면을 온갖 손짓과 표정으로 풍성하게 담아낸다.

 사하이를 연기한 인도의 국민배우 아미타브 밧찬의 신들린 듯한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불가능은 내가 미셸에게 가르치지 않은 유일한 단어”라는 바위처럼 단단한 신념, 인생은 아이스크림 같으니 녹기 전에 맛있게 먹으라는 따스한 가르침은 관객의 가슴에도 오래 남을 것 같다.

 멜로의 계절 가을을 여는 첫 영화로 썩 잘 어울리는 감동과 눈물의 명편이다. /안순택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백석대·백석문화대, '2024 백석 사랑 나눔 대축제' 개최
  2. 한기대 생협, 전국 대학생 131명에 '간식 꾸러미' 제공
  3. 남서울대 ㈜티엔에이치텍, '2024년 창업 인큐베이팅 경진대회' 우수상 수상
  4. 단국대학교병원 단우회, (재)천안시복지재단 1000만원 후원
  5. 1기 신도시 첫 선도지구 공개 임박…지방은 기대 반 우려 반
  1. 남서울대, 청주맹학교에 3D 촉지도 기증
  2. 올해 대전 분양시장 지형도 도안신도시 변화
  3. "전국 검객들 한 자리에"… 2024 대전시장기 펜싱대회 성료
  4.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연내 착공 눈앞.. 행정절차 마무리
  5. 대덕구보건소 라미경 팀장 행안부 민원봉사대상 수상

헤드라인 뉴스


대전 분양시장 변화바람… 도안신도시 나홀로 완판행진

대전 분양시장 변화바람… 도안신도시 나홀로 완판행진

올해 대전 분양시장 지형도가 도안신도시로 변화한 분위기다. 대다수 단지에서 미분양이 속출했는데, 유일하게 도안지구의 공급 물량만 완판 행렬을 이어가며 수요자들의 높은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업계는 하반기 일부 단지의 분양 선방으로 기대감을 나타내면서도, 내년에 인건비와 원자잿값 상승, 제로에너지 건축물 인증 의무화 등으로 인한 분양가 상승을 우려하고 있다. 21일 부동산 업계 등에 따르면, 최근 분양한 도안 2-2지구 힐스테이트 도안리버파크 2차 1·2순위 청약접수 결과, 총 1208세대(특별공급 제외) 모집에 1만3649건이 접..

"전국 검객들 한 자리에"… 2024 대전시장기 펜싱대회 성료
"전국 검객들 한 자리에"… 2024 대전시장기 펜싱대회 성료

대한민국 펜싱의 역사를 이어갈 원석을 찾기 위한 '2024 대전광역시장기 전국생활체육 펜싱대회'가 뜨거운 열기 속에 막을 내렸다. 시장배로 대회 몸집을 키운 이번 대회는 전국에서 모인 검객과 가족, 코치진, 펜싱 동호인, 시민 2200여 명이 움집, '펜싱의 메카' 대전의 위상을 알리며 전국 최대 펜싱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23~24일 대전대 맥센터에서 이틀간 열전을 벌인 이번 대회는 중도일보와 대전시체육회가 주최하고, 대전시펜싱협회가 주관한 대회는 올해 두 번째 대전에서 열리는 전국 펜싱 대회다. 개막식 주요 내빈으로는 이장우..

[현장]구청·경찰 합동 쓰레기집 청소… 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현장]구청·경찰 합동 쓰레기집 청소… 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속보>="내 나름대로 노아의 방주 같아…'나는 자연인이다' 이런 식으로, 환경이 다른 사람하고 떨어져서 살고 싶어서 그런 거 같아요." 22일 오전 10시께 대전 중구 산성동에서 3층 높이 폐기물을 쌓아온 집 주인 김모(60대) 씨는 버려진 물건을 모은 이유를 묻자 이같이 대답했다. 이날 동네 주민들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쓰레기 성이 드디어 무너졌다. <중도일보 11월 13일 6면 보도> 70평(231.4㎡)에 달하는 3층 규모 주택에 쌓인 거대한 쓰레기 더미를 청소하는 날. 청소를 위해 중구청 환경과, 공무원노동조합, 산성동 자율..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