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승용 문화재청 정책국장 |
지난 2003년 32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디지털 유산(Digital Heritage) 보존에 관한 헌장’이 채택되기까지 했다. 기록유산은 물려받은 유산에 대한 자부심 보다 현재 진행 중인 매체기술의 진화 속에서 후손과 동시대인들의 지식 발전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뒤돌아보기를 요구한다.
미국 대통령이 퇴임할 때 비행기 여러 대 분량의 재임 시 생산된 자료로 박물관을 건립한다는 이야기를 부러운 마음으로 듣는다. 과거 우리나라의 일부 정권 교체 시 청와대 뒤편에서 며칠에 걸쳐 방대한 분량의 문서를 소각한다는 소문과 대비되는 전통이다. 우리 조상이 물려준 의궤(儀軌)에 담긴 소상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숙연해진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급속한 경제 발전기를 거치면서 조상이 물려준 기록문화의 전통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만도 우리는 국가적으로 충격적인 사건과 중요한 행사를 치렀다. 숭례문 화재와 복구공사, 광화문 복원공사, 두 번에 걸친 전직 대통령 장례식 등 후손들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학문적 목적이나 정책결정 과정에서 궁금해 할 일들이 시시각각 발생되고 있는 것이다. 방송사들이 영상 촬영을 하고 신문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하고 있지만 이들 기록물이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지 의문이다.
우리나라의 정보기술 발전 속도나 인터넷 보급률은 선진국 수준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 망을 채울 콘텐트가 없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급속히 늘어가는 블로그나 사용자제작콘텐트(UCC)의 양은 세계의 어느 나라 못지않다. 이제 디지털 기술 환경 속에서 콘텐트의 질적인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두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인터넷상의 콘텐트는 그 속성상 끊임없는 부침 속에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사라져 가는데 우리는 사이버 공간의 불량 게시물이 가져 올 해악만 의식했지 소중한 가치를 보존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못했다. 국제적으로 공유할 만한 양질의 콘텐트와 후손들에게 물려줄 기록유산은 보존해야 한다. 유네스코의 디지털 유산에 관한 각성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둘째, 방송과 통신의 융합에 대한 기술발전만 강조했지 영상, 사진, 문자 등 여러 가지 매체를 결합하여 기록대상의 본질적 가치를 담아내는 방법론을 등한시 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건축물을 사진이나 그림으로 기록하기 위한 지침서를 정교하게 개발하여 이 분야 전문가들이 배우도록 한다.
우리의 경우 정부 연구소에서 무형문화재를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전문가들의 공동 작업을 통해 국제적으로 내놓을 만큼의 기준과 방법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조상이 물려준 기록유산에 만족하지 말고 후손에게 물려주고 세계인과 공유할 기록물을 창조해야 하며, 이를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한 분야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기록유산의 방법론과 인접학문을 체계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전문 인력 양성과 디지털 기록유산 보존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대통령 취임식, 전직 대통령 장례식, 숭례문 복구공사 등은 정치, 문화, 사회에 관한 우리 동시대인들의 가치관과 지혜가 응축된 것이다. 이들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전문성뿐만 아니라 관련된 인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안목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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