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천리 물길에는 예로부터 오랜 역사의 숨결이 서려 있다. 특히 백제의 옛 도읍으로 찬란한 문화가 꽃 피었던 공주와 부여 일대의 금강변에는 지금도 수많은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금강변에 자리한 대표적 역사문화 유적 중 하나가 공산성이다.
▲ 공산성 서쪽의 성벽과 금서루 |
웅진시대 백제의 왕궁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으로 남아 있지만 공산성 안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실제 이 곳은 천혜의 요새로 기능하기에 충분한 지형을 갖추고 있다. 북으로 금강이 흐르고 있으며, 저 멀리 차령산맥에 둘러싸여 있어 적의 침입을 막기에 제격이다. 이는 또한 옛 백제가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이기도 하다.
동서로는 약 800m, 남북으로는 약 400m 정도 뻗어 있는 장방형의 공산성 안에는 현재 백제시대의 연못과 고려 때 창건한 영은사,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과 사적비, 공북루ㆍ만하루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공산성은 본래 웅진성으로 불리다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곽은 본래 토성으로 축조됐으나 조선 중기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됐다.
공산성의 서쪽 송산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고분군은 금강을 끼고 자리잡은 옛 백제의 혼이 서린 곳이다. 무령왕릉을 비롯해 7기의 백제시대 왕과 왕족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는 12점의 국보급 유물을 포함해 2900여 점에 달하는 백제 시대의 중요한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졸속적인 발굴로 한국 고고학계의 최대 발굴이자 최악의 발굴이라는 오명을 함께 남긴 곳이다.
서쪽으로 송산리 고분군을 아늑하게 감싸 돌아 나가는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나서면 금강을 중심으로 한 백제 역사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고마나루가 나온다. 고마나루는 지금 그 옛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방을 쌓아 올리기 전 강물이 넘나들었을 무령왕릉 서쪽의 낮은 구릉지대까지가 나루에 포함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 항공에서 내려다 본 고마나루 모습 |
이곳 고마나루는 백제 역사의 중심무대인 동시에 국제적 교통의 관문이었다. 금강 하구에서 시작된 뱃길이 이어져 선박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며, 수많은 인파가 강을 건너던 곳이었다.
비록 나루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넓은 백사장과 솔밭이 물줄기와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고마나루의 상징성은 그에 얽힌 전설에서 연유한다. 아득한 옛날 고마나루 근처 연미산의 큰 굴에서는 암곰 한마리가 한 사내와 연을 맺고 살았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 이 사내가 곰을 피해 도망쳐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애원하며 쫓아가다 새끼들과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고, 그 곳이 지금의 고마나루라는 것이다. 웅진은 고마나루 즉, 곰熊나루津를 뜻하는 것이고, 공주를 지나는 금강을 웅진강이라 부르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고마나루 근처에는 후일 마을사람들이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는 곰사당이 이 애잔한 전설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찬란했던 문화 사비 백제에서 숨을 쉬다
공주시내를 가로지르는 금강은 고마나루를 지나 백제의 역사를 따라 부여로 흐른다. 부여를 지나는 금강변에 사비 백제의 중심이었던 부소산성이 자리하고, 그 곳에서 패망의 한이 서린 낙화암이 금강의 물줄기를 조망하고 있다.
부여에는 백제 역사의 흥망성쇠가 그대로 서려 있다. 읍내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라 봐도 무방하다. 읍내에는 백제시대의 절터 정림사지가 남아있고, 백제의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궁남지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강 줄기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과거 백마강으로 불리는 부여지역 금강변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유적지 중 하나가 바로 왕흥사지다. 왕흥사지는 부소산 서북쪽의 낙화암과 고란사가 건너 보이는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위치해 있다. 왕안리 마을 남쪽 기슭에 자리에 구드래 나루도 한 눈에 바라다 보이며, 이 곳에서 바라보는 금강변의 경관 역시 빼어나다.
▲ 만하루와 연지 앞으로금강의 물줄기가 흐르고 강건너 공주시내의 전경이 아득히 보인다. |
또 『삼국사기』에는 왕흥사와 관련해 `신라 태종 무열왕이 백제 패망 후 강을 건너와 이곳에 남아 있던 백제 병사 700여 명의 목을 베었고, 이후 폐허가 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왕흥사는 백제의 사찰 중 문헌에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600년 봄 정월에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라고 『삼국사기』에는 전하고 있다. 1934년 절터에서 `왕흥(王興)'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토기 조각 등 백제의 유물이 다수 발견됨에 따라 실제 그 존재가 확인됐으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지난 2007년 백제시대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앞선 577년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창건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와 장암면 일대의 성흥산성도 중요한 백제시대 유적으로 꼽힌다. 부소산성으로부터 직선거리로 10㎞ 가량 남쪽에 위치한 성흥산성은 금강 하류의 요충지로 전해진다.
백제 시대에 확실한 축조 시기를 알 수 있는 대표적 산성으로 백제의 1품 관직이었던 위사좌평이 이 성을 관장하며 금강 하류 일대를 관측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금강의 물줄기를 따라 우리 역사의 발자취가 새겨진 이유는 간명하다. 예로부터 강은 주요한 삶의 터전이었으며, 소통과 교류의 중심지 였다. 강을 따라 사상과 문화, 기술과 물자가 모여지고, 자연스레 역사가 살아 숨쉬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강종원 연구위원은 “공주와 부여 일대 역사문화 유적은 모두 금강과 연결돼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금강의 물줄기는 그 역사성이 함께 복원되고 되살아 날때 비로소 온전히 살아 날 수 있다”고 말했다./글=이종섭·사진=김상구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