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유성에 온천 수맥을 개발하고 홍인탕을 세운 민 회장은 그 후 대전을 지키며 충청남도 개발대상 1회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그를 통해 과거 유성온천을 되돌아봤다.
유성 온천이 막 결혼식을 마친 한 쌍의 원앙이 들리는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던 때가 있었다. 1970~80년대 유성 온천은 대전이나 충남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 등 전국에서 기차를 통해 신혼부부들이 이곳을 찾았단다.
민 회장은 “유성 온천탕에서 목욕을 하고 지금은 없어진 연당이라는 호수에서 사진을 찍는 게 제대로 된 신혼관광 순서로 여겼다”고 기억했다. 그리고는 “호텔 앞에 있는 슈퍼에서 ‘유성온천 관광 기념’이라고 박음질 된 기념수건을 사서 집에 돌아가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인기품 중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유성호텔 옆에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어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한 관광객들이 대전과 유성은 행정구역이 달랐기때문에 시외버스를 타고 유성을 찾았다고 한다. 또 온천이 전국적으로 몇 곳 없던 때로 유성에서 온천목욕을 하고 숙박은 근처 민박이나 작은 여관에서 하는 정도가 그 시대 신혼부부들의 정석이었다.
병의원을 자주 찾을 수 없던 때는 관절염이나 위장병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치료 겸 휴양을 위해 유성을 많이 찾아왔다고 민회장은 기억했다.
▲1977년 홍인탕 세울 때 하루 3000여명 몰려
민 회장이 1977년 현재 자리에서 온천 수맥을 발굴하고 홍인탕(현재 홍인장)이라는 이름의 온천시설을 세울 당시까지 유성은 유성호텔, 만년장 등 규모 있는 시설은 몇 개 안 됐었다. 그나마 홍인장이 들어서기 전에 있던 온천시설은 일본인이 발굴하거나 타지역 기업에서 개발한 것이고 유성에서 나고 자란 고향민이 온천 개발에 성공한 것은 홍인탕이 처음이었단다.
민 회장은 “선대부터 온천 수맥을 찾기위해 시도해 17번 실패하고 제가 다시 개발에 들어가 온천개발에 성공하게 됐다”며 “전문적인 기업이 아닌 유성주민이 온천개발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유성에 개발붐이 일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또 “당시 대중온천탕과 방 46개를 가지고 시작했는데 온천 목욕을 위해 하루 3000여명이 찾던 시기도 있었다”고 했다.
1993년 엑스포를 앞두고 지역 기반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면서 유성온천 지역이 크게 발전했다고 봤다. 민 회장은 “당시 도로 등 사회인프라에 2조 원이 투자되면서 지금의 한밭대로 등이 만들어져 유성에 대한 접근성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유성온천 개발에 대한 기대
하지만, 유성지역이 1990년대 이후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는데한 아타까움도 전했다. 민 회장은 “유성온천지역이 1990년대 모습과 바뀐 게 없다”라며 현재의 정체 유성온천 모습에 아쉬워했다.
동시에 유성온천지역에 지역경제를 이끌 수 있는 대형기업이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즘 경향에 맞게 온천과 놀이를 함께하고 품격을 갖춘 휴양시설이 필요하다는 것.
민 회장은 “목욕은 집에서도 쉽게 할 수 있게 되면서 온천에 대한 가치가 떨어져 문제”라며 “치료기능을 하는 보양온천 지정 등 유성온천이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모두 고민할 때”라고 말했다. /임병안.사진=이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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