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막걸리 한잔... 370년 세월의 서먹함도 눈녹듯

대통령과 막걸리 한잔... 370년 세월의 서먹함도 눈녹듯

<일본도요산책> 10. 심 수관 청와대 예방

  • 승인 2009-08-17 19:04
  • 신문게재 2009-08-18 12면
  •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예술가가 되고 싶으냐?” 쇠약해진 13대 옹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렷하게 물었다. 자신도 젊었을 때 그 같은 장소에서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심 씨 십 수대(代) 예풍(藝風)이 하찮은 것이라면 몰라도….

심 씨 가문 십 수대는 산줄기와도 같은 것이다. 조상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지만 그 유작(遺作) 하나하나엔 개성이 뚜렷하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마치 산맥을 기복(起伏)시키는 산봉우리와도 같다. 그래서 산의 모습은 제 각기 다르다.

그 산봉우리 하나가 되는 것만으로 훌륭한 일생이 되지 않느냐, 그런 뜻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마침 14대 수관은 어느 전람회에서 출품을 권유받고 있었다. 그 권유에 매력도 있었고 또 새로운 작품 활동에 야심이 꿈틀거리고 있을 때라 부친의 말에 불만을 느꼈다. “그렇다면 도대체….”하고 심 씨는 우는 소리를 냈다.

“나라는 자체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 당신께서도 젊으셨을 때 가업을 계승하는 일을 놓고 고민하셨겠지만 도대체 나는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것을 일러 달라고 했다. 14대 수관은 어릴 때 부친에게서 영어도 배우고 수학도 익히며 도기(陶器)를 구웠다.

부친은 항상 스승이었다. 30이 지나 14대도 아이를 갖게 되자 부친의 위대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심 씨는 “일러 주소서”하고 빌다시피 했다. 13대옹 자신은 생애의 애환(哀歡)에 응축(凝縮)되어 있었다. “아들을 그릇구이로 만들어라”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고 네가 할 일 또한 그뿐이라 했다.

▲ 오노이소는 도공 1대의 가무

▲ 가마에 들어가기 전의 도기들
▲ 가마에 들어가기 전의 도기들
소설가 ‘시바’는 그날 ‘가고시마’로 돌아와 산 위에 있는 숙소에 들었다. 저 멀리 바다 위에 반짝이는 별을 보고 내일은 개이리라 싶었으나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사쿠라지마’ 쪽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내일 아침 열 시에 ‘나에시로가와’로 가야 한다.

‘교쿠장구우(玉山宮)’가 있는 산에 심 수관 씨와 함께 가기로 약속이 돼 있다. 될 수만 있다면 내가 어렸을 때 만주에서 돌아올 때 본 그 푸르른 조선 하늘이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날 밤 ‘시바’는 피곤한데도 언제나 여행 중에 그랬듯이 밤이 이슥토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노리소’라는 가무가 있다. ‘교쿠장구우’의 신관(新官)들이 음력 8월 보름날이면 묘전(廟前)에서 제를 올리고 춤을 추며 한어(韓語)로 노래를 부른다. ‘사츠마야끼’ 도감(圖鑑)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오는 날 오는 날의 하루하루가
오늘 이날과 무엇이 다르리.
해가 지고 해가 뜬다.
오늘은 오늘 한 세상 어느 때나 같은 그날.

‘시바’는 한국어를 모르다보니 ‘오노리소’를 한문으로 고친 것을 음만 따서 이렇게 만들어 보았다. ‘나에시로가와’에 전하는 한국 음 그대로를….

오늘날이 오늘이라 내일이 또한 오늘이라 날은 지는데….

이렇게 된다고 하면 가사(歌詞)는 네 구절로 나뉘어진다. 옛날 악기를 울리며 느린 가락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면 서산에 지는 해도 제 자리에 머물도록 한가로운 기분에 잠길 것만 같았다. 한국에는 이 노래의 가사와 악보가 남아 있다지만 악보를 읽을 길이 없고 실제로 이것을 노래하는 곳은 ‘나에시로가와’의 산상(山上)뿐이라는 얘기다.

▲ 오늘은 오늘, 한 세상 어느 때나 같은 그날.

이는 신전(神前)에서 노래하던 조선인이 아니고서야 저 하늘과 땅이 닿을 것 같은 무감동(無感動)의. 그래서 대자연처럼 광대한 이조도자(李朝陶磁)의 풍치는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다음날 아침, 하늘은 맑게 개었다. ‘나에시로가와’와 마을에선 심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길을 가로질러 옆길로 들어서자 왼편은 어두컴컴한 맹종죽의 숲이다. 남기(嵐氣)가 일만큼 깊숙하다. 바른편에는 푸른 돌담이 있고 해묵은 집터가 남아 있다. “마을을 떠난 사람의 집입니다.”하고 심 씨가 일러준다. 이윽고 오솔길이 지형상(地形上)으로 보면 용암대지(熔岩臺地) 같은 언덕을 향해 꾸불꾸불 나있다.

▲ 단군 殿이 玉山宮으로

좀처럼 사람의 왕래도 없는 듯 야생의 수선이 길까지 부리를 뻗치고 대여섯 발짝마다 조그만 덤불을 이루고 있다. 돌로 된 ‘도리이(鳥居 ? 紳社의 井形門) 밑을 지났지만 신사는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종달새 소리가 귓가에 울려오는 널따란 대지(臺地)가 나왔다.

유채(油菜) 밭에 씨가 한창이다. “저 산입니다.” 심 씨가 가리키는 그 산은 고대 일본인들이 이 산을 ‘간나비야마(甘南備山)’라고 우러러 받들고 거기 산신령을 모시기도 한 그 산과 흡사했다. 그 옛날 조선인들이 이곳에 표착했을 때 한밤 중 멀리 바다 저편에서 화광(火光)이 날아와 이 산꼭대기에 머문 채 몇날 밤을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일행 중에 태점(太占)을 하는 이가 점을 쳐보니 화광은 조신(祖神), 단군(檀君)의 신령이고 그 신령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일행을 지키기 위해 백두산에서 날아왔노라고 했다. 그때부터 화광이 머문 바위를 신주(神主)로 모시고 신묘(神廟)를 만들었다고 한다. 대지의 융기(隆起)로 생겨진 봉우리인데 그 봉우리 기슭에 돌로 된 도리 이가 있다.

그 오른편에는 나한송 노목(老木)이 한 그루, 그 밑에는 조그만 자연석이 놓여 있다. 들여다보니 한국의 주일대표부 특명 전권대사가 다녀간 기념비였다. 비석 저쪽은 골짜기고 하늘은 그대로 넓게 열려 저 멀리 ‘기리시마(霧島)’의 산줄기가 보인다. “마을사람들은 긴 여행을 떠날 때 반드시 여기에 올라와 기원을 하고 갑니다.”

심 수관 씨는 1974년 11월 씨의 반평생에서 가장 긴 여행을 했다. 서울, 부산, 고려 세 대학의 미술사(美術史) 교수들의 초청이었다. 심 씨는 서울 호텔에 묵을 때 갑자기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 일본 대표부에 그 뜻을 비쳤더니 참사관 말이 “그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천황폐하가 외국손님을 일일이 접견합니까?”했다. 생각하고 보니 과연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서류를 제출했다. 이날 예정대로 서울대학 대강당에서 심 씨는 사회자로부터 ‘심 수관 선생’이라고 한국 발음으로 소개되었으나 300여 년 전에 이미 한인임을 끝낸 심 수관 씨로서는 불가불 ‘사츠마’ 사투리가 섞인 표준 일본말 이외에는 얘기할 길이 없었다.

▲ 심 씨 서울대와 고대 강연

강연은 통역을 거쳐 진행됐다. 심 씨는 사투리가 섞인 표준 일본말 이외는 얘기할 길이 없었다. 심 씨는 강연 끝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옳은지 어떨지’하면서 나는 한국학생 제군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구에 와서 많은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36년간 일본의 압제에 대해서 얘기했다.

▲ 가고지마의 활화산(사쿠라지마)
▲ 가고지마의 활화산(사쿠라지마)
지당한 얘기고 과연 그대로이긴 하나 그것에만 얽매일 때 절은 한국은 어떻게 될까. 옳은 말도 지나치면 거기서 후퇴가 시작된다. 새로운 국가는 앞으로 전진(前進)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말을 했다. 같은 말이 다른 일본인 입에서 나왔다면 청중은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강당에 가득 찬 학생은 연단 위의 심 수관 씨가 누구인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원래가 ‘사츠마’인답게 감정이 풍부한 심 수관 씨는 이따금 눈물 때문에 말이 막히곤 했다. 목이 메면 그것이 계면쩍어 얼핏 농담으로 바꾸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36년을 얘기한다면 나는 3백 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끝맺음을 했을 때 청중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러나 심 씨의 말이 자기들 마음과 통한다는 표시로 연단 위의 심 씨에게 노래를 보냈다. 노래는 한국 도처에서 애창된 그 곡은 심 씨도 서울에 와서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다.

노래는 ‘노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사내’로 시작됐다. 학생들은 심 씨에게 보내는 우정을 이 가사에 담아 불렀으리라. 노랫소리는 강당을 뒤흔들었다. 심 씨는 단상에서 넋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눈물이 안경을 적셨다. 그러나 심 씨는 여기서 ‘사츠마’인답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물을 재빨리 농담으로 바꿔놓아야 했다. 심 씨는 ‘가고시마’의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사츠마’인 다운 ‘사츠마’인으로 알려져 있다. 심 씨는 그럴싸한 농담 한마디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합창의 물결에 밀려 심 씨의 감정은 제 자리에 멈추고 있었다. 심 씨는 대합창이 끝날 때까지 단상에서 몸을 떨며 서 있었다.

강연을 끝내고 심 씨는 호텔로 돌아왔다. 프런트에 일본 대표부에서 전갈이 와 있었다. 전화를 걸어보니 관방장관(官房長官) 말이 대통령이 만나준다니 관저로 가라는 것이다. 심 씨가 관저 정문에 들어서자 뜰에는 꿩이 날고 있었다. 약간의 절차를 거친 뒤 박 대통령이 직접 만나주겠다는 얘기였다.

일본인으로서 단독면담이 허락된 것은 드문 일이다. 관방장관의 안내로 긴 복도를 지났다. 접견 장소는 대통령의 서재였다. 이런 사적(私的)인 자리가 마련된 것도 아마 예외일 것이다. 대통령은 좋은 형님 같았다. 심 씨가 두고두고 그런 생각을 하도록 박대통령은 편한 자세로 심 씨를 응대해 주었다.

얘기가 오가던 도중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몇 장의 지도를 탁상에 펼쳐 보였다. 그것은 남원성의 지도였다. “자네 선조가 잡힌 곳이 여기지 아마” 대통령은 심 씨에게 이 얘기를 선물하고 싶었나 보다. 마치 육군대학에서 전술강의(戰術講義)하듯 양군(兩軍)의 병력, 배치 등을 설명하며 그 날짜와 시간 그리고 치혈했던 남원성 공방전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만찬에 초대되었다. 그때 박대통령은 “자넨 막걸리를 좋아하나?”하고 물었다. “막걸리를 좋아합니다. 막걸리도 나를 좋아합니다.”하고 ‘사츠마’ 속담으로 대답하자 박대통령은 “막걸리를 섣불리 많이 마시면 배탈 나기 쉽네, 조심해야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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