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부여읍으로 향하기 위해 백제대교를 건너면 그 끝에 강변을 따라 난 오솔길이 나온다. 읍내에서 나오다보면 길 건너에 자리하고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 좁다란 길을 따라 안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다보면 시인 신동엽의 시비(詩碑)를 만날 수 있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라고 시작되는 그의 시 `산에 억덕에'가 새겨진 시비는 그에 대해 `우리 강토와 겨레의 쓰라린 역사와 혹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 비원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 시인 신동엽은 1930년 부여읍 동남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이곳 금강변에서 민족의 역사를 탐닉하며 뿌리 깊이 새긴 저항 정신을 노래하다 짧은 생을 마감한 민족 시인이다.
시비가 세워져 있는 금강변에서 멀지 않은 부여읍 동남리에는 신동엽 시인의 생가도 자리 하고 있다. 군청 네거리에서 부여문화원 뒷길을 돌아 들어가면 읍내 한 가운데 들어서 있는 주택들 사이로 나지막한 단층 기와집이 하나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시인이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곳이다.
신동엽은 이곳에서 지금의 부여초등학교(당시 부여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이 시절 신동엽은 민족의식에 눈을 뜨고 토지 개혁 운동과 남한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는 동맹 휴학에 가담했다 퇴학을 당해 다시 고향 땅을 찾게 된다. 후일 그는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또 다시 부여에 잠시 머무르다 부산과 대전의 전시연합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간다. 이 무렵이 바로 신동엽이 친구와 함께 부여와 공주 일대의 백제 유적지와 갑오농민전쟁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후일 작품의 초석을 닦은 시기다. 그는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등단했으며, `껍데기는 가라', `금강' 등의 시를 발표하며 민족 정신을 불태우다 1969년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현재 부여군 능산리의 야산에 묻혀 있다.
▲백제의 한이 서린 강
신동엽이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고 정신을 남기는 곳'이라고 노래한 금강에는 충청인의 오랜 역사와 혼이 서려 있다.
부여 일대의 금강은 백마강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고 있다.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부소산을 휘감아 흐르는 백마강은 백제의 한과 슬픈 전설이 서린 강이다.
바로 이곳에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용으로 변한 의자왕을 낚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백제성을 공격하려던 소정방이 이곳에 이르러 자욱한 안개에 휩싸여 강을 건널 수 없게 됐고, 의자왕이 용으로 변해 조화를 부리고 있다는 술사의 말에 따라 백마를 강에 던져 용을 낚아내자 비로소 안개가 걷혔다는 것이다. 이때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조룡대다. 백마강이라는 이름도 이에 연유해 있다.
낙화암에 서린 삼천궁녀의 전설도 백마강에 슬픔을 더한다.
`백제,/천오 백 년, 별로/오랜 세월이/아니다.//우리 할아버지가/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몇 번 안가서/백제는/우리 엊그제, 그끄제에/있다.//진달래,/부소산 낙화암/이끼 묻은 바위서리 핀/진달래,/너의 얼굴에서/사랑을 읽었다./숨결을 들었다,/손길을 만졌다,/어제 진/백제 때 꽃구름/비단 치마폭 끄을던/그 봄하늘의/바람소리여.'<신동엽 시 `금강' 제5장 중>
백제시대 중요한 국사를 논했다는 천정대를 비롯해 조룡대와 낙화암, 자온대, 구드래 등 백마강변에는 가는 곳 마다 무수한 역사의 파편들이 널려 있다. 아름다운 백마강의 풍광 역시 그 숱한 전설 처럼 슬픔의 미학을 담아내고 있다. 해질녘 백마강가에 이르면 물 속에 잠긴달과 낙화암의 소쩍새 울음소리, 저녁 고란사의 풍경소리가 이 슬픔의 미학을 절정으로 내 몬다. 시인 장석주는 “부여팔경에는 나라를 잃은 자들의 처연한 심사가 어려 있다”고 말한다.
▲부소산 낙화암, 흩어져간 꽃잎들
후일 시인이 완성할 대서사시의 노랫말을 새겼을 부소산에 오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공주의 서남쪽이 부여인데 백마강 가이며 백제의 옛 도음터다. 조룡대, 낙화암, 자온대, 고란사는 모두 백제시대의 고적이며, 강변에 맞닿은 암벽이 기묘하고 경치가 매우 훌륭하다. 또 땅이 기름져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작고 좁아 평양·경주보다 훨씬 못하다'고 적고 있다.
백마강 기슭의 부소산이 바로 사비로 도읍을 옮긴 백제가 최후의 성곽이자 마지막 왕궁터로 삼았던 곳이다. 부소산 정상의 사자루(사비루)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혹자는 부소산 어귀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이 가장 아름답다고도 한다. 강물에 몸을 던져 떨어져간 꽃잎 처럼 애잔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위에 뿌리 내린 소나무 가지 사이로 저 멀리 펼쳐지는 백마강은 쉼이 없다. 역사가 흐르듯 강물은 그저 부소산을 향해 굽이쳐 흐르고 있을 뿐이다. 시인 신동엽도 이 곳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역사와 민족의 아픔을 상기했을 터다.
낙화암 아래 부소산 북쪽기슭의 백마강변에는 고란사가 자리하고 있다. 저녁 무렵 백마강가에는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고, 고란사의 고즈넉한 풍경 소리를 들으며 이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노래 한 구절이 귓가를 맴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낙화암 그늘에 울어나보자/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면은/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그 누구가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낙화암 달빛만 옛날 같구나'
고란사는 백제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후일 백제의 유민들이 낙화암에 몸을 던진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실 이곳 고란사는 바위 틈에서 자라나는 고란초와 한 모금 마실때마다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약수로 더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백제의 왕들 역시 이곳의 약수에 고란초를 띄워 마셨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야생 상태의 고란초를 눈으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고란사 바로 앞 유람선 선착장으로 걸음을 옮기면 배를 타고 구드래나루터로 향할 수 있다. 강 위에서 바라보는 낙화암과 부소산은 또 다른 절경을 연출한다. 황포돛배가 유유히 떠 가는 백마강은 역사의 흔적도 그 아픔도 모두 묻어둔 채 여전히 말없이 흐르고 있다. /이종섭 기자 no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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