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살갗' 도공의 심장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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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요산책> 9. 사츠마 자기의 성장

  • 승인 2009-08-03 17:53
  • 신문게재 2009-08-04 12면
  •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심 씨는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일부러 그런 화제를 끄집어냈는지도 모른다. “이겁니다.” 하더니 깨어진 도편(陶片)을 코르덴바지에 문질러 소설가 ‘시바’의 손바닥에 얹었다. 그것이 단순한 난백색(卵白色) 파편에 지나지 않았으나 옆에 다가와 함께 들여다보던 심 씨는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자신도 “이만한 것을 구워낼 수 있을는지….”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도기(陶技)의 전승이란 예사로운 일이 아닌 듯하다. 불세출(不世出)의 명인이라던 12대 심 씨의 아들 13대는 이 ‘나에시로가와’에 전승해온 ‘고젠구로(御前黑)’만은 딱 질색이었다.

▲ 12대 심수관作 화병<왼쪽사진>과 13대 심수관作 향로.
▲ 12대 심수관作 화병<왼쪽사진>과 13대 심수관作 향로.
‘구로사츠마(黑薩摩)’는 민간 수요(需要)이고 ‘시로사츠마(白薩摩)’는 영주 ‘시마츠’ 가(家) 전용으로 되어 있었다. ‘구로(黑)’에도 예외가 있어 도질(陶質)이 황금빛을 내는 검은 빛을 띤 것은 성주(城主) 진용으로 되어 있었다. 그 비법(秘法)은 상속자에게 구전(口傳)으로만 가능했다.

12대 심옹(沈翁 )은 13대에게 그 빕법을 전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기법은 단절되고 말았다. 14대 심 씨가 20대 시절 어느 정월 초하루 다례(茶禮)를 마치고 부친 13대 옹이 “넌 바보야”하고 술김에 아들을 놀렸다. 농담이긴 했으나 심 씨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뒤 어느 해 관례대로 당대 주인이 그 해 계획을 발표하고 도공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과제를 주는데 아들 심 씨에겐 올해엔 너 혼자 힘으로 ‘고젠구로’를 구워보라고 했다. 심 씨는 조금 전 부친이 한 말을 트집 삼아 “아버지 같이 현철한 분도 못 구해낸 ‘고젠구로’를 저 같은 바보가 어찌 만들어내겠습니까?”하고 말대꾸를 했다.

이때 친정에 왔던 고모가 소스라쳐 놀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심 씨 집안은 예부터 가장(家長)의 말씀은 절대적이었다. 이날까지 새해 첫날 아침 부모 앞에서 말대꾸한 사람은 없었다. 고모는 심 씨 집안도 다 됐다고 울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앉아 있던 심 씨는 일본이 새로운 민법을 공포한 지 수년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딴 집은 몰라도 이 ‘나에시로가와’ 심 씨 집안에 태어난 이상, 십여 대를 이어온 가율(家律)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부친 앞에 사과하고 그 명령에 복종키로 했다.

▲ 나베야마에서 陶土 발견

그러나 ‘고젠구로’란 말만 들었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날부터 심 씨는 골방에 처박혀 초대(初代)부터 전해오는 온갖 서류를 뒤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속에서 12대가 써 놓은 듯한 비망록(備忘錄)을 찾아냈다.

‘나베야마(鍋山)에서 유약(釉藥) 나옴’이라는 대목이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고젠구로’의 유약채취 장소가 ‘나베야마’라는 추측은 갔으나 이것만으론 마치 보물찾기와 다름없는 일이었다. 부친에게 그것을 보이자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했다.

‘나베야마’란 ‘나에시로가와’에서 10리 쯤 떨어진 덤불 산인데 그곳에서 유약이 나온다는 것은 13대 기억에도 분명치 않았다. 어쨌든 ‘나베야마’에 가보겠다고 하자 부친은 ‘야마히라 헤가꾸(山平へカク)’라는 성미가 까다로운 향사(鄕士)이니라’ 하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때가 소화 30년대였다. 그 까다롭다는 사람이 산 속 깊이 은거하고 있다니 그것은 ‘사츠마’인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심 씨는 선물로 과자를 싸들고 오토바이를 타고 그를 찾아갔다. ‘사츠마’ 사투리를 듣고 있노라니 마치 ‘겐빼이(源平 ? 平安末期(11세기경)) 정권다툼을 하던 源氏(겐지)와 平家)시절 젊은 무사가 일당백의 기개로 적진에 뛰어드는 모습을 방불케했다.

‘헤가꾸’ 노인은 듣던 대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이 근처에서 유약이 나온다는데요.”하고 묻자 노인은 화가 난 듯 한동안 잠자코 있더니 “몰라!”하고는 외면해 버렸다.

다시 묻자 “모른다면 몰라!”하고 내뱉듯이 쏘아붙였으나 그 자그마하고 마른 얼굴 어느 구석엔 마치 종기의 근 같은 것이 있어 대답 뒤쪽엔 무언가를 애써 감추려는 빛이 역력했다. 심 씨는 ‘사츠마인’인지라 어루만질 줄도 알고 있었다.

잠자코 물러나와 수일 후 이번에는 소주와 닭을 사들고 찾아갔으나 유약에 대한 화제는 일체 입에 담지 않았다. 그 후 몇 번을 그런 식으로 노인을 찾아갔으나 노인은 선물만 챙기고 아무 것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7월 그믐께 큰 비가 내렸다.

▲ 야미히로 노인의 옹고집

일기예보에 밝은 13대 옹이 내일은 태풍이 올지 모른다고 한 어느 날 심 씨는 빗속을 무릅쓰고 그 노인을 찾았다. 노인의 집은 덧문이 닫쳐진 채였다. “여보세요! 심 수관입니다.”하고 문을 두드리자 노인은 놀란 얼굴로 심 씨를 맞아들이면서 “젊은이! 진정이었구먼!”했다.

비로소 손님으로 대해 주는 것이었다. 언제나 앉던 마루에서 방안 ‘이로리(圍 爐裏 ? 방바닥을 네모로 파내어 불을 때는 장치) 곁으로 인도됐다. “일러 주십시오!” 심 씨가 간곡히 부탁을 하자 노인은 봄눈 녹듯이 “음~ 모레아침에 일찌감치 오라구!”했다.

모레라고 한 그날, 아침 여섯 시 조금 지나 노인은 기다리고 있다가 부인에게 띠를 내놓게 하더니 그것을 심 씨에게 넘겨주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 하자 “이걸로 날 업어”라고 했다. 80이 넘은 노인이라 걸음이 시원치 않았다. 노인을 등에 업자 그는 등 뒤에서 일일이 방향을 지시했다. 뒷산은 덤불이 무성했다.

노인은 대나무 하나를 길게 잘라 세죽(細竹)을 손에 쥐어주니 말이라도 탄 기분인지 등 뒤에서 대 회초리로 이리저리 갈 길을 지시했다. 골짜기에 닿자 노인은 등에서 내렸다. 노인은 나무 등걸에 앉으면서 “거길 파보라고!”하며 회초리로 한군데를 가리켰다.

심 씨는 시키는 대로 괭이를 휘둘렀으나 거기서는 기대했던 흙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곳을 몇 군데 더 파보았으나 노인이 일러 준 어느 곳에서도 화산지대 특유의 잿빛 모래 흙만 나올 뿐 바라는 도토(陶土)는 구경할 수가 없었다.

“산이 망령 났다.”며 노인은 산을 탓했다. 산도 변했다. 내 산이건만 50년 전의 기억이다. 대나무와 수목이 성장해서 골짜기 모습도 달라졌다. 이때 노인은 엉덩이가 시리다면서도 그대로 앉아 있다. 그 노인보다 심 씨의 피로가 더했다. 하루 종일 여기 저기 파헤치자니 괭이가 천근만치나 무거웠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젊은이, 골짜기 저쪽 언덕을 파보라고!”하며 다시 회초리로 가리켰다. 심 씨는 정강이까지 묻히는 낙엽토를 밟으면서 그곳까지 갔다. 언덕은 온통 양치(羊齒) 식물로 뒤덮여 있었다.

거의 단념 하다시피한 심 씨는 낫으로 풀을 베고 그 낫으로 언덕의 흙을 후벼보았다. 축축한 물질이 잿빛 모래흙과는 전혀 다른 갈색 초콜릿 빛 질 좋은 흙이 낫 끝에 묻혀 나왔다. 서둘러 풀을 베고 표면을 벗겨 보자 수산화철(水酸化鐵)이 침전(沈澱)된 보기 드문 토층(土層)이 나타났다. 한 움큼 집어 핥아보니 철분을 함유한 진한 맛이다.

심 씨는 다짜고짜 가져온 전대에 이 흙을 담아 노인 곁으로 가져갔다. “글쎄, 이건가보군!”하더니 노인은 심 씨가 한 대로 자신도 그 흙을 핥았다. 이때 노인은 조건을 말했다. “영구무상(永久無償)이여!” 거저 준다는 뜻이다. 단, 구워내는 자기 하나씩을 가져오라는 것이다.

▲ 14대 수관 구로사츠마 제작

“큰 것은 일 없어 술잔만하면 돼! 부엌에서 쓰는 그릇이 좋아. 난 이렇게 별난 늙은이지만 약속을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어!” 하지만 50년 전 그때 그릇구이는 약속을 어겼어! 너희 할아버지는 훌륭했지만 딴 사람들은 약속만 하고 지키지 않았다. 구운 것을 하나도 안 가져왔거든. 그래서 다시는 그릇구이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지. 자네가 그렇게 부지런히 찾아왔지만 가르쳐주지 않은 건 그 때문이야.” 노인은 이런 말을 했다.

심 씨는 그 흙을 오토바이에 싣고 달렸다. 태풍이 지나 간 뒤라 길은 험했고 흙이 튀어 발치가 엉망이었지만 이때의 기쁨은 어디에 비할 바가 없었다. 유약의 배합은 몇 대 전 선조가 남겨 놓은 전서(傳書)대로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시작품(始作品) 셋을 함께 구었다.

그러나 가마에서 나온 것은 검기는 한데 단순한 검은 빛에 지나지 않았고 그 황금을 깐 듯한 배(梨)빛 살갗은 나오지 않았다. 약속대로 노인에게 그릇을 가져갔다. “잿빛이 아니구먼!” 노인은 그렇게만 한 마디 했다. 그 뒤 몇 번인가 다시 가져갔으나 노인의 언짢아하는 표정은 짙어갔다.

모두가 단순한 검정 빛깔이었다. ‘고젠구로’란 이런 게 아냐. 노인은 혀를 찼다. 어느 날 심 씨는 시험 삼아 가마 하나를 다 못 쓰더라도 들어가는 대로 넣어보기로 했다. 가마에서 꺼낼 때는 두려운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다. 이때 심 씨는 놀랐다.

무슨 기적인가. 그 중 몇 개가 ‘고젠구로’로 구워져 있지 않은가. 나머지는 모두 깨버렸지만, ‘고젠구로’란 원래가 그런 것인 것을 이 실험에서 심 씨는 깨달았다. 심 씨는 아직도 더운기가 식지 않은 그 중 하나를 가슴 속에 품고 노인에게 달려갔다.

노인은 그것을 보자 머리를 숙여 절하더니 ‘가미다나(神棚)’ 앞에 놓았다. 그 후 한 달쯤 해서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에 심 씨는 허둥지둥 ‘나베야마’로 달려갔다. 상청에는 부인이 차렸는지 그 ‘고젠구로’가 놓이고 거기 노란 국화꽃 몇 송이가 물에 떠 있었다.

심 씨는 14대 계승자로 훈련을 받아왔다. 심 씨 자신도 앞서 말한대로 하마터면 끊길 뻔한 전통을 지키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전통을 계승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13대 옹은 소화 39년(1964) 4월 1일, 75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보다 얼마 앞서 심 씨는 결심하고 부친에게 승낙을 청했다.

다른 도예가들처럼 요즘 유행하는 전시회를 갖고 싶다고 했다. 13대 옹은 전부터 그런 일은 심씨 가풍에 맞지 않는 허황된 것이라 해서 자신의 경우도, 아들에게도 이를 허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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