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완하 한남대 문창과 교수 |
또한 여러 문제의 처리과정에서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집 문제였는데, 그것이 왜 그런가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집이란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것이다. 집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세상의 번지 없는 하나의 점에서 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을 구하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곳에 살던 누군가 자리를 비워야만 내가 그곳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머무는 집은 다른 누군가 머물고 싶어 하던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번에 대학교 1학년과 중학교 3학년 두 아들을 데리고 간다. 최근에 늘어난 외국유학에도 크게 움직이지 않던 내가 두 아들을 대동하는 것은 나에게 다가온 기회를 아이들에게도 누리게 하려는 이유다.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아들들이 날이 다가오자 점점 호기심을 가지고 설레는 것을 보고 내심 기쁘기도 했다. 특히 중학생의 경우는 그곳에 가서 클럽활동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구상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우리는 아직 한국에 있고, 며칠 후의 이국생활에 대해서는 상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주변에서 이를 두고 송별회를 열자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떠남이 주는 뉘앙스는 무엇보다 크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반응을 두고 막상 돌아올 때의 성과에 부담을 갖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미 필자를 가두던 상황을 벗어나서 좀더 다른 각도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년이라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 그러나 돌아온다는 전제 위에서 1년을 여행의 개념으로 보면 그것은 긴 시간이다. 필자는 어떤 성과보다는 좀더 내가 생각하는 관점 자체에 대해서 돌아보는 계기를 가지려 한다. 그간 내가 살아왔던 사고방식에 대하여, 내가 추구해 왔던 문학의 가치와 방향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이다. 그 낯선 문화와 부딪치면서 필자에게 새로이 전개될 시간들에 대해서 나는 내심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계획보다는 나의 계획을 넘어선 어떤 세계로부터 다가오는 새로운 순간을 통해서 좀더 신선한 낯섦과 그 충격에 직면하고 싶은 것이다. 필자의 다음번 글은 미국 버클리에서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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