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덕훈 한남대 교수.일본게이오대 객원교수 |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 시의 선봉장으로 악랄했던 무장으로서의 가토 기요마사(1562~1611). 그가 만든 성이니 우리에게는 약간 다른 감정이 다가오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두 나라에서 등장하는 역사의 어쩔 수 없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강연요청으로 필자를 초청해준 K 대학의 오카모도 교수는 축성술의 전문가였던 기요마사가 구마모토 성에 당시의 기술로는 쉽지 않았던 급경사의 석축을 쌓았기 때문에 그동안 여러 난에도 무너지지 않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유명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엄청난 기술의 석축 축조술과 큰 규모의 구마모토 성이 아니었다. 우리가 기요마사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게 구마모토에서는 가토 기요마사를 신과 같은 평판과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가토 기요마사처럼 일본과 한국의 평가가 정반대인 인물도 드물다고 하겠다. 기요마사가 세이쇼공이라 불리며 그를 참배하는 신사가 있는 이유는 석축을 쌓아 물을 가두거나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하거나 외국무역을 통한 지역민들을 잘살게 해서 나타난 결과이기에 (기요마사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는 너무나 달라) 처음에는 허탈한 기분이었다. 기요마사는 정유재란 시에는 자기가 축성한 조선의 울산성에서 조명(朝明)연합군에 밀려 12일간의 죽을 고비를 넘겨서인지 구마모토에는 지금도 울산(蔚山)과 같은 한문을 우루산 으로 발음한 울산마치(蔚山町)가 있다. 또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왔다고 하는 조청과 물엿으로 만든 조선아메가 있었다.
특히 400여 년 역사의 조선아메의 원조 소노다야가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잊고 싶은 역사이지만 400여 년을 지켜온 일본인들의 장인정신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또 우리가 전해준 것이 아닌 그들의 침략으로 가져간 우리의 문화가 400여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일본에 남아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 것인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기요마사는 50세에 죽고 아들이 뒤를 이었으나 도쿠가와 막부에의해 영지(54만석)를 몰수당하고 호소가와 가문이 이 영지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호소가와 타다도시 (細川忠利)는 기요마사를 존경하는 영민들을 파악하여 기요마사의 위패를 세우고 구마모토에 입성했다고 한다.
구마모토 성에서의 역사적으로 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메이지유신 후에 한국을 정벌하자고 한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주인공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세이난(西南)전쟁에서의 신정후덕(新政厚德)을 내세우며 자기가 일으킨 명치 정부를 반대하며 2000명의 명치군대가 주둔해 있는 구마모토 성을 2만 명으로 포위 했다. 그러나 2만 명으로 성을 공략하고도 전쟁에서 패배한 사이고가 남긴 말은 우리가 진 것은 세이쇼공 때문에 졌다고 할 정도로 기요마사의 축성술은 뛰어났던 것 같다. 그들의 침략으로 가져간 우리의 문화가 일본에 남아있는 것을 보고 또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자체가 구마모토는 우리에게는 두 번이나 보이지 않는 굴욕적인 역사의 메아리로 다가온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구마모토 성을 제일 많이 오는 관광객은 한국사람이라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국인들은 구마모토 성을 보면서 가토 기요마사의 이야기만 듣고 가토 가문이 2대에 단절된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며 300여 년 뒤의 메이지유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그저 둘러보는 수준의 관광으로만 보는 안개속의 구마모토 성에는 무서운 일본 무사의 혼이 담겨 있음을 조금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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