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그 때 만약 한국이었다면하는 가상을 해 보며 그들의 선진 정치문화를 선망했다 미국민의 분열과 그로 인한 상처를 더 염려하던 패자 앨 고어의 처신은 또 얼마나 위대하던가 나같은 문외한이 생각해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는 여전히 요지부동 좀체로 바뀔 것 같지 않으니 더욱 이상한 일 아닌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떠오르던 개헌논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대치국면의 정치권은 일단 시큰둥한 반응이라지만 지난 어느 때보다 실현 가능성은 높아 보이는 상황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법 또한 영원불변의 것일 수는 없는 것이니 시대정신의 변화에 맞춰 적당히 바꾸는 일이 크게 잘못된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무려 아홉 번이나 허물고 기워 온 60년 남짓한 헌정사에 또 다시 열 번째 개헌 논의가 일고 있으니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우선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싶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평균 6년에 한 번 꼴로 되풀이해 온 잦은 개헌이 밥술이나 먹고 산다는 나라에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5년 단임의 대통령 중심제를 골간으로 하는 현행 헌법은 체육관 선거를 거부하고 숱한 희생을 치르며 싸워 얻어 낸 값진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서로 먼저 대통령 될 욕심에 마음 급했던 3김을 포함한 당시 정치지도자들의 야합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니 꼭 빌려 입은 옷처럼 낯설고 어색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바꿔 입자는 말 나올 줄 알면서도 여론 살피며 저 먼저 입 밖에 내기는 주저해 온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터에 이왕 공론의 마당에 나왔으니 더 이상 주저할 것 없이 진지하게 논의하여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실은 열 번 백 번 고치고 바꿔봐야 이대로는 그 나물에 그 밥 결코 대수로울 게 없다는 회의가 먼저다 좋은 법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법은 어디까지나 사람에 의해 만들어져 사람에 의해 운용되는 것 제 아무리 좋은 법이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사람이 지키지 않고 존중해야 할 사람이 존중해 주지 않는다면 그 법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법이란 어차피 누구에게나 다소간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제도다 서로 다른 욕망구조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자니 불가피하게 만들어 낸 최소한의 통제장치인 때문이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것이 된다면 법은 설 자리가 없고 존재 가치를 잃을 수 밖에 없다
유권자가 행사한 표의 가치가 얼마든지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수도 있는 우스운 선거제도를 200년 넘게 고집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생각은 도대체 무엇일까 바로 이것이다 법이란 함께 존중하고 지키고자 할 때 비로소 법다울 수 있다는 것 이해관계에 따라 멋대로 능멸하고 유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말이다 거기엔 맨 처음 그 법을 만들어 낸 선조들의 정신을 존중하고 받드는 마음이 배어 있기도 하다 바로 이 마음 이 정신 없이는 우리 헌법 아무리 고치고 바꿔 봐도 별스러울 수 없다 온갖 불법과 무법이 난무하는 오늘의 현실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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