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인플레이션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갈수록 경제분야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경제에 대한 상식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라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에 한국은행은 일반인들의 경제에 대한 상식을 높여주기 위해 이번주부터 매주 월요일 금융간지판에 ‘금융상식 코너’를 마련,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로 했다. <편집자주>
사상초유의 사태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세계경제도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위기극복 과정에서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발등의 불을 끄는 심정으로 쏟아 부은 유동성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실례로 과거 독일은 전후(戰後) 막대한 재정지출로 인해 통화량이 급증하면서 1922~1923년중 물가상승률이 325만%에 이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맞은 바 있다. 당시 독일 중앙은행이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대규모로 인수하면서 시중 유동성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렇다면 통화팽창에 따른 우리나라의 인플레이션은 언제 처음 나타났을까.
근대적 의미에서의 우리나라 최초의 인플레이션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63년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재건 등을 위해 자금 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각종 세금을 신설해 강제로 징수하는 한편, 1866년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해 재정 지출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백전 발행이 급격히 늘어난 결과 시중 통화량이 급증하게 됐고 1867~1868년 중에는 미곡 1섬의 가격이 약 6배로 폭등할 정도로 물가가 크게 상승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는 심각한 경제 혼란을 야기하며 민란 발생, 대원군 실각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통화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재화에 대한 수요 급증이나 공급 축소 등과 같은 실물부문의 충격과는 별도로 인플레이션은 급격한 통화팽창으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조선말 우리가 경험한 극심한 인플레이션 현상이 잘 이야기해준다. 만약 당시 지금의 한국은행과 같이 물가 안정과 통화량 조절 기능을 수행하는 중앙은행이 있었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