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썩어가는 생명의 숨죽임 속에 이제는 우리가 진정한 상생의 길이 무엇인지 답해야 할 때다. 본보는 그 답을 찾아나서기 위해 ‘금강리포트-비단길 천리에서 상생을 찾다’를 시작함에 있어 우리가 가야할 금강의 현재를 개괄적으로 들여다 본다. <편집자 주>
▲천리 물길이 시작되는 곳, ‘뜬봉샘’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해발 896.8m 높이의 신무산(神舞山). ‘신들이 춤 춘다’하여 이름 붙여진 이 산 동쪽 골짜기 중턱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작은 옹달샘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시작된 가녀린 물줄기는 산 바로 아래 수분마을을 지나면서 수분천이라 이름을 얻고 외로이 흐르다 또 다시 작은 지류들과 합세하며 거대한 물줄기를 이룬다. 이 물줄기는 충청의 산야를 가르며 천리를 흐르고, 그 끝에 이르러 서해 바다와 만난다.
▲ 미호천(오른쪽위에서 왼쪽으로 흘러들어오는 천)과 갑천(오른쪽아래부터 왼쪽위로 흘러들어가는 천)이 합강되는 금강. /김상구 기자 |
이 작은 옹달샘이 바로 ‘충청의 젓줄’로 오랜 세월 이 땅을 품어 온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이다. 뜬봉샘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온다.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에는 이곳이 ‘장군대좌혈(將軍大坐穴)’의 명당으로 역적이 날까 두려워 숯불을 놓고 불을 질러 뜸을 떴던 자리라하여 ‘뜸봉샘’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설(說)에 의하면 예로부터 고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이 산 곳곳에 뜸을 뜨고 봉화불을 올린 것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뜬봉샘에 세워진 안내판은 공식적으로 태조 이성계에 얽힌 이야기를 ‘뜬봉’의 유례로 전하고 있다. 조선 건국 이전 신무산 중턱에 신단을 쌓고 백일기도를 올리던 이성계가 ‘새나라를 열라’는 계시와 함께 떠오른 무지개 위로 날아가는 봉황을 본 뒤 그 자리를 찾으니 풀섶에 덮힌 옹달샘이 있었고, 봉황이 떠오른 곳이라하여 ‘뜬봉’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그 원천을 알 수 없는 신비함을 간직한 뜬봉샘, 그 아래에는 금강의 첫 마을인 수분리(水分里)가 자리하고 있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뜬봉샘에서 솟아난 물줄기가 두 갈래로 나뉘는 곳이다. 바로 이곳 마을 앞 수분재에서 남과 북으로 나뉜 물줄기가 북으로는 금강, 남으로는 섬진강을 이룬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물뿌랭이 마을’로 전해지는 이곳의 옛 지명은 이곳이 천리 금강의 발원지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이곳을 출발한 물줄기는 장수를 지난 진안에 이르면서 덕유산을 타고 흐르는 구량천과 마이산에서 시작된 진안천을 만나며 제법 굵은 물줄기를 형성한다.
그렇게 시작된 금강은 전라도와 충청도, 인간이 만든 인위적 경계를 넘나들며 20여개의 지천을 품에 안고 서해로 흐르고 있다.
▲역류하는 ‘비단강’
금강의 총 연장은 395.9㎞, 유역면적은 9810㎢에 달한다. 낙동강과 한강에 이어 국내에서 세번째로 긴 강이다. 상류에서 구불구불한 골짜기를 따라 굽이쳐 흐르는 동안 무주구천동, 영동의 양산팔경 등의 절경을 빚어내며, 서해를 향해 흐르는 동안 보청천, 미호천, 갑천 등 크고 작은 지류들을 만난다.
금강(錦江)은 본디 굽이쳐 흐르는 물길이 마치 비단결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어원이 ‘비단강’이 아닌 ‘곰강’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일부 문헌에 금강은 ‘웅진강(熊津江)’으로 기록돼 있으며, 공주에 남아 있는 ‘곰나루’라는 명칭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금’의 어원이 곧 ‘비단(錦)’이 아닌 ‘곰’의 사음(寫音)이라는 얘기다.
금강은 실제로도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강의 상류지역은 적등강(赤登江), 공주와 부여에 이르러서는 각각 웅진강(熊津강)과 백마강(白馬江), 그 아래는 강경강(江景江), 진강(鎭江)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금강은 한때 ‘반역의 강’으로도 불리었다. 동에서 서로 또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여느 강과 달리 금강은 발원지를 시작으로 충북 부강에 이를때까지 남에서 북으로 역류하다 충남 연기에 이르러서야 흐름을 바꿔 남서로 흐른다. 이 모습이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 시위를 연상시킨다고들 한다. 태조 왕건이 금강 주변의 산형과 지세를 들어 후백제의 저항지인 이 일대의 사람들을 경계했다고 전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생명의 강
▲ 금강 발원지 '뜬봉샘' |
금강은 그렇게 뭇 생명을 잉태한 ‘어미의 강’이다. 그곳에는 100여 종 이상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으며, 수십만 마리의 새들이 날아든다. 수 많은 수서곤충과 식물군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상류의 무주 일대에는 반딧불이와 그 먹이의 서식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고, 영동에는 수상 생태계의 포식자인 쏘가리와 꺽지가 물살을 가른다. 금강에는 어름치와 쉬리가 헤엄치고, 멸종위기동식물로 지정된 금강의 특산종 감돌고기가 서식한다.
강의 중ㆍ상류와 하구에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가창오리와 큰고니를 비롯해 흰뺨검둥오리, 백로 등 수 많은 철새와 텃새들이 공존한다.
금강이 미호천과 합류되는 연기군 합강리는 육상과 수상의 생태계가 만나 강이 생명의 보고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일대에는 30과 61종 2967개체가 서식하고 있다. 천연기년물 활조롱이와 멸종위기종인 노랑부리저어새, 참매 등이 날아들며, 천연기념물인 수달도 삶을 영위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강
금강은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너른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오랜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고대의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문화의 중심지로 융성했던 백제의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류의 대전분지와 청주분지, 중류의 호서평야, 하류의 전분평야가 펼쳐져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예로부터 발달한 해상교통과 농업 생산으로 번성했던 옛 상업도시와 고도(古都)가 자리하고 있다.
구석기에서 청동기에 이르기까지 금강유역에서 발견된 선사시대의 유적들은 고래로부터 이곳이 인류의 주요한 삶의 토대였음을 말해준다. 이 강을 중심으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옛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이곳은 유교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가깝게는 한때 번성했던 상업과 농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철도와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이전 강과 바다가 만나는 뱃길은 주요한 산업도로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후기 이후 우리나라의 3대 장시(場市) 가운데 하나인 강경이 옛 영화를 간직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연유다.
▲흐르지 못하는 강
그러나 인간의 과욕은 이 천리 물길에 변화를 가했다. 개발와 오염으로 신음하는 강은 더 이상 생명을 품지 못한 채 탁류를 머금고 흐르지 않는다. 지난 세월 금강의 물줄기는 두 개의 거대한 댐으로 가로 막혔다. 인간이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필요한 물을 공급 받기 위해 만들어 낸 이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 물길을 가로막았고, 그 물길을 따라 흐르던 생명의 노래와 또 다른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앗아갔다. 지난 1980년 완공된 대청댐은 30년 가까운 세월 대전과 청주 등에 각종 용수를 공급하고 있지만, 그것이 가져온 물길의 변화는 회복할 수 없는 길을 건너야 했다. 지난 2001년 완공된 용담댐 역시 수많은 아픔과 갈등의 기억을 간직한 채 시간의 기억을 지워가고 있다.
지난 1990년 완공된 금강하구둑은 바다로 흐르던 강물을 완전히 가로 막았다. 부여까지 넘나들던 바닷물도 더 이상 강으로 흐르지 못한다. 이 곳에 이르러 금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닌 ‘호(湖)’로 불린다. 금강과 서해바다를 잇던 뱃길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이로 인해 해마다 무서운 양의 토사가 쌓이고 수질이 악화돼 가고 있다.
생명이 흐르지 않는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금강을 다시 생명이 흐르는 강으로 만드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 이 생명의 물길에 대수술을 예고하고 있다. ‘강을 살리자’는 목소리는 한결 같건만 그 길을 둘러싸고는 이견이 적지 않다. 진정한 상생을 위한 변화의 길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김재승 하천사랑운동 대표는 “자연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의미한다”며 “이 세상에 물길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 없는데 인간의 욕심이 그곳에 손을 대는 순간 그 자연스러움은 사라질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이종섭 기자 no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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