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세월 담은 '상앗빛 백자' 유럽도 홀렸다

질곡의 세월 담은 '상앗빛 백자' 유럽도 홀렸다

<일본도요산책> 7. 조선도공의 류큐(琉球) 진출

  • 승인 2009-11-26 10:07
  • 신문게재 2009-07-07 12면
  •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시마즈’ 영주는 17세기부터 조선도공들이 만든 도자기를 나가사키항을 통해 유럽에 수출했다. 그 무렵 산업정책상 이들 도공(陶工)을 보호했다고는 하나 명치유신때까지 개성(改姓)은 물론 대외와의 혼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400년간 만행을 견디며 이곳에 대를 이어온 도공들이었다. 이들 도공의 납치과정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연씨도류장(燕氏渡留帳)’엔 세 곳의 도공 상륙지점과 18성 이외에 黃 ? 張 두 가문이 ‘류큐(琉球)’에 도자기 기술지도차 파견한 걸로 되어 있다. 이들 도공 중 星山김씨는 ‘星山家系譜’를 남겼고 박씨계 6대 朴平意는 ‘立野?苗代川燒物由來記’를 썼다.

▲ 도공들이 처음 상륙한 시마비라(島平) 해안.
▲ 도공들이 처음 상륙한 시마비라(島平) 해안.
여기서 ‘薩摩’ 가마터는 ① ‘龍門’요 ② ‘苗代川’요 ③ ‘堅野’요 ④ ‘西餠田’요 등 넷인데 그 중 苗代川계도 여러 갈래가 있지만 첫 개요지는 串木野요였다. 이 가마는 1599년 납치당한 도공들이 ‘島平’에 개요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이 요지(窯址)는 현재 밭이 되어버렸지만 옛날 도자기를 굽던 조선식 ‘蛇窯 : 산언덕에 뱀 같이 만든 가마’에서 잡기를 구워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도요는 백토로 자기를 구워 영주만 사용했다는 이른바 ‘히바카리’를 생산한 것이다.

‘히바카리(火計リ)’란 흙은 한국서 가져오고 ‘불’만 때어 구웠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도공과 흙을 조선에서 수입했으니 일본 것은 그야말로 ‘불뿐(히바카리-火計リ)’이라는 뜻이다. 그때 도공들은 반농반도의 고달픈 생활을 하며 조선 백토로 ‘히바카리’를 구워 저 유명한 ‘히라다왕(平茶碗-火計リ手 뵤字銘 1600년경 口徑 26.5, 높이 5㎝)’을 구워냈다.

그것은 사발과 대접을 닮은 그릇이었다. 1630년 토착민들의 박해로 도공들은 남쪽 苗代川에 이주, 다시 朴平意 중심의 ‘모토무로(元室陶窯)’요를 개설한다. 영주(島津)는 왜란 후 ‘關が原’ 싸움에서 패해 ‘사쿠라지마(櫻島)’에 숨었다가 도쿠가와와 화평이 성립되자 다시 영토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시마츠’는 조선도공에게 9담보의 토지와 거소 35개를 주고 朴平意에겐 직록 4석과 쇼야(庄室)를 주며 ‘아오에몽(靑衛門)’이라는 이름까지 내렸다. 이렇게 삶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자 도공들은 조국의 건국신 단군을 모시는 ‘교쿠산(玉山)’궁을 세운다.

이때 朴平意(雙用)에 이어 백토를 발견한 도공들이 영주전용 ‘히바카리’를 구워 칭찬을 받았다. 이 업적이 훗날 白薩摩, 錦手, 金?手 등 찬란한 백제를 생산하게 된다. 이 박씨 문중엔 후일 제국시대 최후의 외무대신 ‘도오고(東鄕茂德)’를 배출한 바 있다.

그리고 1669년 五本松요엔 苗代川 도공 35가구를 이주시켜 堅野窯 도공 金貞(日名-聖山嘉八)이 지도하에 일용잡기를 구워냈다. 또 1739년에는 琉球의 도공 用啓基가 와서 朴龍官의 지도를 받고 돌아갔다는 기록도 나온다.

龍門司계의 가마는 卞芳仲(日名-仲次良)이 대표가 되어 요를 열었다는 것이다. 옛 기록에는 이 가마의 작품엔 龍字銘이 들어 있다고 했다. 이렇듯 옛 가마를 소개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 백자는 領主의 전용물

영주 ‘시마즈’는 한 시대 용맹으로 이름 높았지만 이번엔 도기(陶器)를 갖고 판을 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노경에 접어들었다. ‘시마즈’는 여기서 새로운 상징을 만들려고 ‘나에시로가와’에 번립(藩立) 공장을 세워 제도(製陶)에 힘썼다.

‘사츠마야끼’의 희소성(稀少性)을 유지하기 위해 ‘시로사츠마’를 ‘시마즈’가(家)’ 전용분 외에는 구워내지 못하도록 했다. 단, ‘구로사츠마(黑薩摩)’ 즉 ‘고젠구로(御前黑)’는 일반수요를 허락했다. 그 바람에 각 지방 거상들은 만금(萬金)을 주고도 ‘시로사츠마’를 구하지 못하게 되자 그 주가는 더욱 높아만 갔다.

그러길 300년. ‘에도기(江戶期)’에 와서 ‘시로사츠마’ 기법(技法)은 더더욱 순화되어 갔다. 그 우아한 상아(象牙)빛 살갗, 거기에 따스함을 느끼게 하는 ‘가리노파(狩野派 ? 室町時代-1434~1530)’의 그림까지 곁들여 더 이상 정교한 것이 없을 만큼 발전시켰다.

여기서 막부(幕府)말기 ‘사츠마’ 번은 ‘나에시로가와’에 대규모 백자공장을 차리고 10대 심수관을 주임으로 임명 커피잔, 양식기(洋食器)를 생산, 이를 ‘나가사끼(長崎)’ 경유, 해외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것이 후일 막부를 타도하는 도막(倒幕)의 재원(財源)으로 쓰였다.

이 무렵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사츠마’번은 막부와는 상관 없이 지방정권 자격으로 출품시켰다. 그 중 가장 이채를 띤 것이 12대 심수관의 ‘시로사츠마’였다. 그리고 명치 6년, 오스트레일리아 만국박람회에 심수관의 작품 ‘대화병(大花甁)’은 이미 유럽에서 명성을 떨친 ‘사츠마야끼’ 이름을 한층 더 드높였다.

이것이 ‘나이시로가와’의 번성기라 할 수 있다. 그 후 ‘명치시대’에 들어와 ‘사츠마’ 도법(陶法) 전반이 번(藩)의 보호에서 벗어나면서 왕년의 명성은 점차 사라져갔다.

▲ 13대 수관 ‘일기예보’ 달인

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그는 평소 ‘교꾸장구우(玉山宮)’가 있는 언덕에 올라 동지나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왔으나 짬을 못 냈다가 봄도 다 간 어느 날 겨우 집을 나서게 되었다. 비행기는 예정보다 약간 늦게 ‘가고시마’ 비행장에 닿았다.

▲ 용문사 언덕에 있는 조선도공들의 묘.
▲ 용문사 언덕에 있는 조선도공들의 묘.
해질 때는 빛깔이 바뀐다는 ‘사꾸라지마(櫻島)’가 진사(辰砂)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시바’는 서둘렀다. 시내 서쪽으로 빠져 그 이름 없는 언덕을 넘어 ‘나에시로가와’에 당도한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심수관은 ‘시바’씨를 기다리다 못해 가마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전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방에서 심씨를 기다렸다. 와룡매(臥龍梅)는 벌써 잎이 무성해져서 잎엔 커다란 벌레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방에는 곁방이 딸려있고 그 벽에는 부친 13대 심수관 사진이 걸려 있다. 13대에 대해선 전날 14대 심씨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는데 심씨는 얘기 때마다 돌아간 부친을 떠올렸다.

그 부친은 일기예보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날씨는 그릇 굽는 일에 영향을 미치는 듯 마을 사람들은 날마다 그에게 다음 날 일기를 물으러 왔다는 것이다. 그가 갠다면 반드시 갰고 비가 온다면 이김 없이 비가 왔다. 별다른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부친은 비상한 육감으로 청우(晴雨)를 맞추는 모양이었다.

마을 노인들은 대학에서 배웠을 것이라 했다. 13대 심씨는 그 당시 ‘가고시마’의 조사관(造士館) 제 7고등학교를 거쳐 경도제대 법학부를 나왔다. 14대 수관씨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돌아왔을 때 마을 노인이 그에게 날씨를 물으러왔다.

“모르겠습니다.”라는 심씨 대답에 이웃 노인은 크게 웃으며 “대학을 나왔어도 아무 쓸모가 없군!” 하고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대학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현 호주 심수관씨는 구제(舊制) 중학을 졸업하고 미술학교 진학을 했다.

심씨 집안은 초대부터 양자(養子) 없이 이어져왔으나 어쩐 일인지 어느 대(代)에 가서나 아들은 늘 하나 뿐이었다. 단 하나뿐인 아들이 미술학교를 희망한다면 기뻐해야 할 터인데 13대 심씨는 아들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을에 돌아와 한 평생 그릇을 구어야 할 몸, 젊은 한 때만이라도 그릇과 인연이 없는 일을 해서 한 숨 돌리지 않으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소설가 ‘시바’가 기다리고 있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더니 14대 심수관은 손을 닦으며 들어왔다. 닭을 잡고 오는 길이라는 것이다.

▲ 민간은 검은 ‘쪼까’만 사용

“‘교꾸장구우’는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천천히 한잔 하십시다.” 하면서 소주 ‘죠까’를 집어 들었다. ‘사츠마’에서는 주전자를 ‘죠까’라 부른다. ‘사츠마’ 견문록(見聞錄)에는 ‘사츠마야끼’란 나라에서 일반용을 금지하고 검은 빛깔의 주전자만 허용됐으며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진귀하다며 다투어 이를 가지려 했다’라고 적혀 있다.

‘죠까’의 희귀성에 대해선 민요 가사(歌詞)만으로도 짐작이 간다. ‘쯔보야(壺室)’의 선물로 ‘쪼까’ 세 개를 얻었다. 한 개는 검은 ‘쪼까’, 또 한 개는 갈색 ‘쪼까’. 나머지 하나는 마누라의 하구로(齒黑 鐵漿이라 해서 기혼여성들이 이(齒)에 물을 들이는 진한 褐色 쪼까)를 꼽았다.

행길에서 ‘구시끼노’ 생선장수 소리가 들려오자 길 얘기가 나왔다. “저 길은 옛날부터 저렇게 넓었나요?”하고 묻자 “예! 옛날부터 넓었죠, 말이라도 달릴 만큼 노폭이 넓어 ‘사쿠라노바바(櫻馬場)’라 불렀습니다.” 했다. 이 길은 ‘나에시로가와’의 별명이기도 했다. ‘구시끼노’나 ‘가고지마’ 근처에서 오는 장사꾼들은 지나칠 때마다 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했다.

이 마을이 다른 마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도쿠가와 초기 이곳을 번(藩)의 규칙으로 학문이 강요됐다는데 있다. ‘시마츠’는 초대부터 도공(陶工) 아들을 무조건 상속시키지 않고 시험제도를 만들어 기법이 능한 자에게만 녹봉을 내려 가업을 계승시켰고 무능한 자는 비록 장남이라 할지라도 가업을 잇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기법시험과 병행해서 학문 시험제도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300년 동안 이 마을 자녀들은 시험공부에 정신이 쏠렸고 그것이 어느 새 마을의 풍습이 되어버렸다. 글을 읽는 습관은 13대 심씨 소년시절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뜰이 어두워졌다. 심수관씨는 술이 세다. 그래도 조금은 취했는지 목소리가 한결 명랑해졌다.

좀처럼 슬퍼하지 않는 심씨이지만 “그래도 때론 슬픈 일이 있었어요.”라며 소년시절 다른 일본인에게 골탕 먹은 얘기를 했지만 그 얼굴에선 시종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전국(戰國)시대 ‘시마츠’ 번의 강병책이 원인인지 ‘가고시마’ 소년들에겐 종전(終戰)때까지 싸움질은 공공연한 풍습이었다.

중학에 입학하면 강약의 순서가 정해질 때까지 여기저기서 매일처럼 싸움이 벌어졌고 1학기가 끝날 때 즈음 겨우 그 학급의 강약서열이 결정되어 학년전체가 조용해진다. 14대 심씨는 ‘나에시로가와’ 소학교를 졸업하고 60리나 떨어진 ‘가고지마’ 구제 2중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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