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전 한남대 사회문화대학원장 |
매란방은 유년 시절 천대 받는 재인(才人)의 길을 걷지 말라는 경극배우인 백부(伯父)의 만류를 뿌리치고 경극에 뛰어들어 활동하던 중 평론가 구여백은 만나, 경극에 살아있는 인간이 보이지 않음이 문제라는 그의 지적을 무대에서 개선하여 새로운 차원의 경극을 만들어낸다. 매란방은 경극의 여성 배역인 <단(旦)>의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파트너이며 남자 주인공 역인 <노생(老生)> 역을 맡게 된 젊은 여성 경극배우 맹소등과 사랑에 빠져 한 때 예술에의 열정을 잃는 위기에 봉착하지만, 아내 지방의 눈물의 설득과 구여백의 비인간적인 술책에 가까운 노력으로 위기를 넘어서게 되고, 거의 승산 없는 도박처럼 감행한 중국 최초 미국 브로드웨이 공연은 전석 기립박수를 받는 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다시 예술과 권력 또는 정치와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한때 매란방의 연기에 심취했던 한 일본 지식인은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에서 문화의 힘을 인식한다. 거대한 중국문화의 위력 앞에 일시적인 국토 점령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중국국민의 문화 상징인 매란방을 희생물로 삼으려 획책한다. 전쟁의 피해 속에 공연중지를 선언한 매란방을 속여 무대에 세워 일제의 남경 학살 후의 중국점령을 합리화 시킨다.
일제는 이어서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하고 있는 매란방을 억지로 기자 회견에 등장 시켜 다시 한번 대동아 공영권의 쇼를 꾸미려 하지만, 매란방은 장티푸스 균을 몸에 주입하는 목숨을 건 저항으로 일본의 책략을 무산 시켜 버린다. 예술에 대한 사랑과 국가의 이익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책략을 꾸며가던 일본 지식인 다나까는 자살함으로써 일본 군부의 반예술적인 작태에 나름대로의 저항의 몸짓을 보인다. 1945년 건강을 회복한 매란방은 중국의 승리로 마무리 된 항일전쟁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어쩐지 중국의 중화주의(中華主義)를 표방하는 선전영화를 본 듯한 느낌을 얼핏 느끼지만 어쩌겠는가, 문화 선진국인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이 늘상 해먹는 수법들인걸.
결과는 이 영화가 나름의 의미를 지니지만 또 다시 중국의 경극을 세계 시장에 환영받는 상품의 자리에 놓아 준다는 사실이다. 경극이 있기에 영화가 가능했다고 한다면 영화는 종속적이고 그 만큼 경극의 아우라는 강화 된다. 대중매체와 순수예술의 관계를 다시 보게 하는 영화 한편이다.
어찌보면 우리의 『서편제』와 궤를 같이하는 영화랄 수 있지만, 서편제가 사적인 삶에 배인 한을 풀어내는 영화인 데 비해 매란방은 현대 중국의 시대적 맥락과 연계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대화 되고 의상, 가면 등 연극적 기재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겠다. 문제는 경극이라는 공연예술과 매란방이라는 희대의 배우가 있었기에 영화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공연예술이나 영화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나 여전히 중요한 것은 관객의 순간 감각을 불러일으켜 감동을 주는 창조적인 배우이다. 올 해 전국연극제에서 대상을 획득한 대전연극이 작금에 작은 논란으로 서로 마음 상하고 있는 정황을 보노라면, 창조적인 배우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서로 아끼고 믿어주는 상생의 분위기가 대전 연극 전체에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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