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단기여행이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중국을 즐기며 우리 독립유적지를 함께 볼 수있다. 여행 코스는 상하이→쟈싱→항저우→전장→난징의 코스를 추천한다.
이곳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에서 중일전쟁으로 창사로 향하는 과정까지의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우선 상하이는 이른 아침 비행기시간을 맞춘다면 대부분의 항일유적을 하루면 돌아볼 수 있다.
현재 마당로 임시정부 청사와 루신공원, 송경령능원을 제외하고 도시개발에 밀려 대부분 흔적 찾기가 어렵지만 오히려 이런 유적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속에 묘한 감동을 얻게 된다. 특히 외탄공원은 상하이의 야경속에 의열단이 폭탄을 실험하고 일본군 대장을 응징하다 실패해 잡혀간 자리하고 생각하면 더욱 간절해진다.
강남대운하의 종점으로 쌀과 물고기가 유명한 항저우는 임시정부가 3년6개월 동안 머문(1932년5월∼1935년11월)곳이다. 시후 인근에 임시정부 기념관이 무료로 운영된다. 이곳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기념관을 중심으로 반경 1㎞ 이내에 독립유적 4개가 아직도 존재한다. 2시간 정도면 모두 둘러 볼 수 있다.
항저우에서 난징으로 향하는 길에는 전장(鎭江)을 들러야 한다. 난징에서 1시간 거리인 전장은 무척 실망할 수도 있는데 골목에 위치한 목원소학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적지가 흔적이 없는데다 위치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 7대 고도 가운데 하나인 난징은 임시정부의 유적은 물론 대립관계에 있던 민족혁명당도 함께 볼 수 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청년들은 명망있는 애국지사를 중심으로 모였는데 대표적 인물이 김구, 김원봉, 지청천 등이다. 이들은 각자 청년들을 모아 중국 군관학교에 보내거나 자체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여기에 해방 이후 최초의 주중대사관 격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본부도 아직 보존돼 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학교 3기생 훈련장소는 시 외각에 위치한 만큼 방문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
▲상하이ㆍ창사ㆍ광저우ㆍ류저우ㆍ충칭 15일
상하이에서 난징까지는 앞서 소개했고 우한(武漢)을 거쳐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임시정부가 거쳐간 8개 도시와 관련도시 유적지를 살피는 코스다.
우한은 우창, 한양, 한커우 즉 우한삼진의 중심지역으로 1927년 국민당정부의 수도가 광저우에서 이곳으로 옮겨오기도 했다. 일본군에 함락되기 직전인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지역이다.
창사는 양자강 중류 동정호의 남쪽으로 일본의 중일전쟁 이후 임시정부가 이곳에 머무른다. 당시에는 임시정부 뿐 아니라 한국구민당, 조선혁명당 등의 주요 독립운동 단체가 이곳으로 이동해 왔다. 중일간 4차례의 대회전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이 시기를 달리하면서 활약을 벌였던 곳이다. 임시정부 청사자리에는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김구의 피격사건이 발생한 남목청은 창사시 지방정부가 당시 모습으로 복원중이다. 김구가 한달간 입원했던 상아의원도 둘러 볼 수 있다.
이어 광저우는 20세기 혁명의 요람으로 구미열강의 침략에 맞서 1920년대 세워진 국민당 정부의 중심지다. 쑨원의 호법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에 특히 많은 성원과 지지를 보냈는데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은 독립운동 중심지가 돼 1928년 한인의 수가 800명에 달했다. 6개의 관련 유적이 산재해 있다.
중국 속담에‘쑤저우(蘇州)에서 태어나, 항저우에서 살며, 류저우에서 묻혀라’는 말이 있다. 류저우는 관으로 유명한 지역인데 임시정부가 1938년 11월부터 1939년 4월까지 머물렀다. 류저우에는 임시정부 청사로 추정되는 건물과 광복진선청년공작대 위문장, 반공호로 사용되던 천연동굴등 5개의 유적이 있다.
치장은 1939년 4월 임시정부가 류저우에서 옮겨와 1940년 충칭으로 떠날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에는 수많은 유적이 산재했지만 지금은 이동녕 주석의 거주지만 남기고 대부분 도시 재개발에 밀려 아파트로 변했다.
충칭은 장강과 가릉강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중국 3대 찜통으로 불린다. 그만큼 여름날씨가 더운데 도시명칭은 경사가 겹친다(雙重喜慶)는 뜻에서 따왔다. 중일전쟁 시기 국민당정부의 임시 수도로 지금은 인구가 3235만명(2007년)의 거대도시다. 임시정부는 이곳에서 해방을 맞아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뜻깊은 지역으로 관련 유적도 많이 분포하지만 우리가 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이에 화상산 한인묘지는 생활쓰레기장으로,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은 철거위기에 처했다.
▲상하이ㆍ충칭ㆍ옌안ㆍ서안ㆍ한단 25일
임시정부 유적지와 함께 고아복군과 조선의용대(군)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코스다. 여행기간은 20일 정도로 제시했지만 실제 지역별로 이동하는데 문제로 실제 시간은 더 많이 소요될 수 있다.
옌안은 항토고원의 험한 산지로 사방을 에워싼 분지 안에 위치한 소도시이지만 황하, 황토, 황제의 고장으로 중국문명의 발원지이자 중국혁명의 성지로 유명하다. 예안이 주목받는 이유는 1935년 모택동이 지휘한 홍군이 대장정을 마치고 공산혁명의 근거지이다. 이곳에는 8개의 독립유적지가 있다.
시안은 광복군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으로 10여 곳의 유적지가 확인됐다. 문제는 유적지의 상당수가 시외각에 존재해 이를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발품이 필요하다. 시안에는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 16명이 시안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임시정부도 곧이어 군사특파단을 파견했다. 임시정부는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를 아예 시안으로 이전했다. 광복군 제2지대가 주둔한 지역은 미국과 공동 군사작전인 OSS훈련이 진행됐으며 본보는 최초의 낙하산 훈련기지를 찾아내 이를 공개했다.
중국의 고도 뤄양이 우리의 독립운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23년의 일이다. 김구 등은 상하이에서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여운형은 한인군사교육을 위해 뤄양강무단에 한인들을 입교시킨다. 이어 1933년 김구, 김원봉, 지청천의 추천을 받은 92명이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한다. 이밖에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으로 진출하는 맹진나루터 등의 유적이 있다.
태항산은 조선의용대(군)가 항일유격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하북성 한단시 섭현과 산서성 좌권현은 하북성과 산서성을 가르며 남북으로 뻗은 태행산맥을 좌우로 감싼 산간지대로 조선의용대는 물론 중국 팔로군의 항일투쟁지 였다. 이곳에는 다행히 조선의용대 유적의 관리가 제대로 이뤄져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유적지간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차량을 전세내야 한다. /상하이ㆍ충칭ㆍ시안ㆍ옌안=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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