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중국과의 국제적 우호를 확대하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보다 활발한 교류 및 역사 바로알기 프로그램이 운영돼야 하고 이를 확대하는 과감한 뒷바침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좌담회에는 이성우 김구재단사무처장, 단국대 한시준교수(역사학),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연구소 김용달 수석연구위원, 이명화 연구위원, 이동언 연구위원이 참석했다. 사회는 그동안 시리즈를 연재한 본보 맹창호 차장이 진행했다.
- 임시정부는 우리역사의 어떤 존재였나
▲한시준 단국대교수(이하 한 교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에서 1945년까지 우리 역사에서 실존했던 정부다. 존재 자체가 곧 역사였다. 최근 일부에서 실존 사실을 부정하고 임시정부를 부정하면서 독립단체로 비하시키려 하고 있다. 지난해 논란을 빚었던 건국 60년 추진이 대표적인 일이다.
정부나 국민들이 임시정부의 존재 의의를 제대로 모르면서 특정한 목적을 가진 세력이 이를 악용하려 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뉴-라이트가 있는데 이들의 역사의식 자체가 문제가 있다. 이승만을 추종해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했고 이를 기초로 그를 건국대통령이란 이미지를 만드려 하고 있다.
▲김용달 수석연구위원(이하 김 수석위원)= 임시정부의 의미는 3.1운동에서 보여준 2000만 민족의 독립의지에 대한 성과물이란 점이다. 임시정부는 4000여년 역사를 계승했고, 민족정권을 세웠으며 고유주권을 행사했다. 우리가 일제에게 강탈당한 주권은 군주주권이고 절대다수의 민족구성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표현한 것이 3.1운동이다.
임시정부의 역활가치는 민주적 원칙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했으며 후대에 이어줬다. 지금 우리의 민주발전도 이에서 비롯됐다. 임시정부는 27년 세월 동안 단 한번도 민주적 절차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아직도 일부에서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 근대화의 바탕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역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
임시정부에서는 의정원(의회)이 정책을 결의하면 정부가 이를 집행했다. 그러한 민주적 절차를 이행했기에 우리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가 빨리 자리잡도록 도왔다. 우리에게는 임정의 민주주의가 가치역사적 유산이다.
임시정부의 가장 큰 가치는 존재가치다. 독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그때를 잘 모른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많은 국민들이 그나마 참았던 것은 대안세력과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권위주의 정권은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뤄졌다. 암흑같은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대안은 임시정부였다.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식민지 한국인에게 희망이었다.
일제에 끌려 나온 학병이 탈출해 임시정부를 찾아와 광복군으로 훈련받고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학병들은 192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다. 철저히 식민지교육을 받은 그들이지만 일본인이길 거부했다. 이는 식민지교육의 실패와 임시정부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 왜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웠나
▲이명화 연구위원(이하 이 연구위원)= 상하이로 임시정부가 통합된 것은 지리적 유리함과 사상의 자유로움, 경제의 중심지 등 모든 면에서 독립운동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조계지라는 점에서 정치적 활동에 어느정도 안전이 보장되었다. 당시 국내는 물론 만주와 러시아까지 임시정부가 만들어 졌지만 정치적탄압으로 정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하이 임시정부로 모든 임시정부가 통합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당시 서로 다른 이해관계속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하나의 정부를 만들면서 나름대로의 의견충돌이 있었다. 독립운동의 방법에 있어서도 외교, 무장, 실력양성 등 서로가 내세우는 중요점이 달랐다. 임시정부는 1923년 국민회의 이후 안정을 찾았지만 연통제와 교통제가 일제에 의해 무너지면서 심각한 타격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정부다울 수있는 노력을 계속해나갔다. 일부에서 임시정부가 외교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종합적이고 총체적 방향으로 나가려했다. 1932년 윤봉길의거 등은 당시 상황에 대한 돌파구로 마련된 일이다.
- 국내에는 실효적 지배가 이뤄지지 못했는데
▲한 교수= 엄밀히 말해 대한민국은 3.1운동때 이미 탄생된 것이다. 3.1운동에서 독립국을 선언했고, 독립국을 수립했다. 이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유지 운영하기 위해 정부를 구성한 것이고,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나라가 망하면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듯 1919년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일부에서 국가구성의 3요소인 국토, 주권, 인민이 없어 국가로 인정되기 어렵다고도 얘기한다. 이 역시 사실을 제대로 모르는 얘기다. 임시약헌 2, 3, 4조를 보면 이를 모두 제시하고 있다. 국민을 대한인민으로 정했고, 주권은 인민전체에 있다고 규정했으며, 판도(영토)는 구 대한제국의 것으로 정했다. 헌법에 규정했고 이를 모두 갖춘 것이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이 실제로 갖추지 못했으니, 즉 실효적 지배가 이뤄지지 않았으니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얘기인데, 구렇다면 대한민국도 국가로 규정하기 어려워지는 자기모순과 함정에 빠진다. 우리 헌법에 대한민국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했지만 북한에 대해 실효지배를 하지 못하는 점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임시정부의 정부역할은
▲김 수석위원= 임시정부의 존재가치 중 또 다른 하나는 그 어려운 와중에도 거국내각을 이뤄냈다는 점이다. 임시정부는 해체를 요구하는 민족혁명당을 받아들여 1942년 민주적 절차를 통해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임시정부내 김구를 중심으로 여당을 형성하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야당을 형성했다. 이들은 대로는 대립했지만 일제에 대하하기 위해 대의를 거스르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좌우뿐 아니라 여야로 파너트 쉽을 보여줬다. 지금부터라도 임시정부의 파트너 쉽을 배워야 할때다. 식민지시기부터 만연한 정치공작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때만되면 나타나는 조직사건과 긴장을 조성시키는 상황이 이제는 끝날때가 됐다. 상생의 협력을 지금의 여야와 남북이 모두 임시정부로부터 배워야 한다.
▲이동언 연구위원=임시정부는 모두 5차례 헌법에 해당하는 임시약헌, 또는 임시헌장을 수정했다. 정부의 역할을 꾸준히 해온 것이다.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의 헌법은 임시정부의 헌법을 거의 그대로 사용했다. 제헌헙법은 물론 지금도 헌법의 전문을 통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내용을 밝히고 있지 않은가?.
정부수립 논란이 일어난것은 이승만에 대한 찬ㆍ반과 긍ㆍ부정 과정에서 추종세력이 벌인 반역사적 행태였다. 임시정부는 유고와 손문의 호법정부에서도 인정했다. 이 같은 논란을 계기로 임시정부의 연구가 더욱 진행돼야 한다. 축적된 연구를 통해 가치를 높이고 더 이상 임시정부를 부인할 수 없도록 연구를 심화시켜야 한다.
▲이 연구위원= 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했었다. 그리고 정부수반의 명칭을‘대통령’에서‘국복(國僕)’으로 정하려 했다. 권위만 누리려는 명칭보다는‘국민의 심부름꾼’이란 명칭을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논란끝에 결국‘국무령’으로 개칭됐지만 임시정부는 국가 책임자는 권위자가 아니라 심부름꾼, 즉 국민주권의 사고를 갖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철저히 3권분립에 기초했고, 이승만의 탄핵도 절차를 무시한 독단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됐다.
-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과의 관계설정은
▲김 수석위원=임시정부를 계승발전 시키는 것은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현재 중국과의 교역량에서도 최대규모를 차지한다. 그만큼 중국과 긴밀한 관계가 필요하다. 북과의 관계는 물론 향후 통일이 됐을 경우 국경을 마주해야하는 입장으로 중요한 국제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중요한 자산을 버리고 있다. 중국에 산재한 수많은 임시정부 사적지는 우리의 중요한 자산이 될 수있다. 우리가 식민지배까지 당한 일본에는 오히려 계속적으로 당하면서도 오히려 신세를 지고 도움을 받은 중국에는 태도가 이중적이다.
특히 우리역사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유산을 배제하지 말고 이를 중국과의 관계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중국 혁명과정에서 참여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내용을 담아 국제파트너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처럼 좋은 자산을 현재로서는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다.
지금 중국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한국사람이라고 한다. 지난 올림픽에서 험한증을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중국과 우리는 심뢰감을 줄 수있는 동반자의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임시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한ㆍ중을 연결시켜주는 역사적 자산이다. 한국독립운동 사적지를 복원해 전시하고 이를 공개해 한ㆍ중이 공동으로 항일전에 나섰던 동지임을 보여줘야 한다.
▲이 연구위원=한국과 중국의 통일전선 구축이 없었다면 우리의 독립은 더욱 어려웠을지 모른다. 동북 3성에서는 중국인과 독립군이 연합해 만주를 지켜냈다. 조선족 출신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중국군과 혈맹으로 일제에 대항했고 지금도 이에 참여한 중국인들은 당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독립운동시기 우리는 분명 중국에 신세를 졌다. 그들과 동지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 해방은 강대국의 성과물 아니었나
▲한 교수=아마도 국민의 99.9%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우리의 힘으로 보질 않는다. 미국 등 강대국이 준 것으로 보고있다. 교과서조차도 이같이 다루고 있다. 하지만 미, 영, 중, 소 등 강대국들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은 그들간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미국은 1942년 진주만 공습으로,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대한 침략으로, 중국은 만주를 넘어 대륙을 침략한 중일전재으로, 소련은 전쟁을 통한 이익을 위해 참전했다.
결국 연합국은 한국을 위해 싸워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운 것이다. 그런데 연합국은 한국이 일본과 싸운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저면 잊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들 역시 식민지를 지배하는 상화에서 한국의 승전국지위는 너무도 껄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이해나 인식의 방법이 강대국의 논리를 따라서는 안된다. 우리의 주체적 인식이 필요하다. 8.15는 누군가 우리에게 주어준 선물이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되찾은 것이다.
- 임정을 계승하는데 김구재단의 역할은
▲이성우 사무처장: 김구재단은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고 아름다운 문화국가의 비젼을 실현해 인재를 양성하고 교육 학술을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는 보훈처 등과 협조해 임시정부의 유적지를 복원하는 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임시정부의 역사코스를 개발해 청소년에게도 제시할 생각이다.
올해는 김구선생 서거 60주년을 맞았다. 미 하버드대학에서도‘김구 포럼’이 열렸고 몽골어판‘백범일지’도 발간됐다. 김구는 사람을 키우는 교육자였다. 우리는 이같은 사업에 대한 지원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 통일한국의 계승방안
▲한 교수=우리역사에서 식민지배는 1910년부터 1945년 뿐이었다. 이를 극복한 것은 독립운동이고 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과거 제국주의 팽창시기 우리민족과 같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한 나라는 없었다. 폴란드도 임시정부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그 시기는 5년에 불과했다.
더우기 우리는 남의 땅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만들어 일제와 싸웠다. 무려 8년동안 8차례나 임시정부를 옮겨가며 단 한차례도 간판을 내리지 않았다. 미래의 해방된 조국을 위해 건국강력을 만들어 온 민족이 참여할 수있는 방안도 제시했다.
이제 국민이 좌ㆍ우로 갈려 분열이 생길때, 통일정부를 만들기 위해 고민해볼때 전례와 기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임시정부다. 통일을 이루는 역사적 체험의 지침을 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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