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운하 소설가 |
이야기가 없는 세계는 불완전하다. 그런 세계는 무의미한 세계이며 삶의 척도가 될 수 있을 그 어떤 윤리나 도덕도, 가치 있는 문화세계의 형성도 불가능한 세계일 것이다.
이야기가 (Mythos)가 없는 세계의 불완전함을 제일 먼저 깨달은 이들은 호메로스 시대의 헬라스 사람들이었다. 핀다로스의 소실되어 버린 시에 관한 기록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신들의 향연에서 제우스는 여러 신들에게 그들이 누리고 있는 행복에서 여전히 중요한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를 물었다.
신들은 제우스에게 말과 노래로 제우스신의 위대함을 불멸적인 것으로 만들 방법을 알고 있는 어떤 존재를 창조할 것을 권유한다.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져 버리고 만다면, 신들과 이 세계의 불멸적인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그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가멸적인 이 세계, 그리고 불멸하는 신들조차 시간을 벗어날 순 없다. 시간도 시간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의 본질은 망각이고 망각은 곧 죽음, 무(無)와 다름 없다.
로마인들은 망각을 의미하는 희랍어 단어 레떼( Lethe)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면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였다. 라틴어에서 레티움( Lethum)은 죽음이란 뜻이다. 또 다른 파생어 레탈리스(Lethalis)는 치명적인, 이란 뜻이다.
“완벽한 망각은 치명적인 죽음과도 같다.” 는 로마인들의 격언이다. 희랍인들에게 이야기로 남는다는 것은 불멸적인 것으로 남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불멸적인 것으로 남을 가치가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노래해야 한다고 믿었다.
불멸적인 것이란 곧 신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며, 신적인 것이란 희랍인들에게는 탁월함아레떼(Arete)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탁월함은 인간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미덕(Arete)이었다. 탁월한 자들, 훌륭한 자들만이 신적인 불멸성의 대체물인 영원한 기억 속에 각인될 자격을 가진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오로지 자신의 무훈이 영원토록 이야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전장으로 주저 없이 나아간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수치를 당하는 것, 불명예스런 이름과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망각을 주도하는 시간과 망각 대신 기억을 끌어들이는 이야기는 대립하는가?
사실은 시간조차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이야기가 없다면, 비가시적인 존재인 시간 자신도 무로 추락한다. 망각은 곧 죽음이고 시간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과거라는 비가시적인 차원의 가시성을 획득한다. 시간은 이야기에 의존한다. 신들조차 이야기에 의존한다. 이야기가 없는 세계는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다. 인간들은 신적인 높이로 올라가기 위해 이야기에 의존한다. 바로 거기에 문학과 역사의 필연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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