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상이용사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가고, 그 가족들은 용사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21세기를 살아간다.
▲ 참전용사 2세대 이정근씨에게 유일한 낙은 매주 수요일에 음식을 준비해 찾아오는 보훈가족 가사돕기 봉사단 뿐이다. |
6·25 전쟁기념일을 하루 앞둔 24일, 서구 월평동 주공아파트의 39.6㎡(12평)짜리 조그만 골방을 찾았다. 이 골방엔 참전용사 2세인 이정근(56)씨가 늙으신 노파를 모시고 살고 있다.
이씨의 부친 이경호 옹은 지난 2006년 1월 폐질환성 질병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이정근씨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옹은 1949년 1월 군에 입대, 전쟁이 발발한 지 10개월 만인 1951년 4월 전역한다.
치열한 전투 중에 총알 두 방이 이 옹의 손을 관통한 1950년 12월 3일, 그로부터 4개월간을 야전병실에서 보낸 후였다.
전역 후에도 이 옹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불편한 손에 어디 하나 일자리를 선뜻 내어주는 곳이 없어, 페인트 공장 등을 전전하며 5명의 자식을 먹여 살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여파로 이 옹은 전쟁에서 잃은 손가락보다도 더 치명적인 폐질환을 앓게 됐고 결국 세상을 하직하게 됐다.
5명의 자식 중 두 명의 아들 역시 객지사와 지병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지켜준 조국은 부상자 이 옹을 50여 년간 부르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했다.
단지 손가락 2개만 없어, 장애가 심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 후 법이 개편됐다는 소식을 병원에 다니면서 듣게 돼 몇 년 전부터 연금을 받게 됐지만, 이 역시 한 달에 27만원이 고작이었다.
그마저 이 옹이 세상을 떠난 3년 전부턴 생활조정수당으로 19만원을 받을 뿐이다.
거기에 이씨가 지체장애로 일정한 소득이 없어 기초생활수급 대상으로 받는 60만원을 합쳐 한 달에 79만원이 이들 가족의 생계수단이다.
1년간 아파트 보증금 200만원과 한 달 관리비 10여만원을 내기도 빠듯한 금액이다. 이씨의 노파마저 병원에 입원해 이들은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빠듯하다.
이들 모자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낙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음식을 준비해 찾아오는 재향군인회 여성회의 ‘보훈가족 가사돕기 봉사단’뿐이다.
이들이 건네는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말, 이것만이 이씨 가족에게 일상의 유일한 낙일 뿐이다.
본보 취재팀과 함께 아파트를 찾은 재향군인회 방명수 안보부장은 “몇 해 전 새터민과의 대화에서 탈북주민들에게 ‘북한에서의 참전용사들에 대한 대우는 어떠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며 “북한에선 참전용사들이 국가 영웅시되는 것은 물론 자식들에게까지 그 혜택을 이어받게 하는데, 대조적인 이 사회의 현실에 씁쓸함을 느낀다”고 말했다./김경욱 기자 dearw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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