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댐이 완공되던 1980년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은 살던 곳을 떠난지 20년이 넘었지만 구정과 추석, 1년에 두 번은 꼭 이곳을 찾아 새파란 대청호 속에 가라앉아있는 고향 들판을 그리는 것이다.
연세호 씨는 고향 음짓말에서 보낸 마지막 밤을 뚜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기가 지던 1980년 7월 말, 갈수록 물은 불어나 전날 논까지 올라왔던 물은 다음날 아침이면 마을 앞마당까지 들어차 있었다. 대청댐이 완공을 앞둔 때여서 불어나는 강물은 내려갈 길이 막히면서 점점 마을로 올라왔다.
밑에 마을 사람들 중 떠날 곳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높은 산으로 거쳐를 옮긴 상태였다.
더이상 집에 머물 수 없던 연 씨는 결국 부모님과 함께 간단한 짐만 챙긴 채 고향을 등져야 했다.
이미 마을사람들은 하나둘씩 이사를 가고 고향 마을은 정겨운 옛 고향모습이 아니었다.
연 씨는 “당시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물이 차오르는데도 산에 움막을 짓고 그 곳에서 지내는 가족도 있었다”며 “정부가 하는 일에 아무말 못하고 고향을 그렇게 떠나야 했다”고 기억했다.
전화기도 없던 시절, 대청호지역 2만 6000여명은 그렇게 하나둘씩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이중 1/3은 정부가 마련한 간척지와 공단 집단 취락지 등으로도 거처를 옮겼지만 나머지 2300여 세대 1만 8000여 명은 친척이 있거나 일자리가 있다는 지역으로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났다.
▲다시 고향을 찾는 실향민
대대손손 살던 고향의에 있던 돌멩이 풀한포기는 지우개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1980년 당시 고향을 잃었던 사람들이 다시 대청호를 찾고 있다. 대청호 수면위로 솟아오른 산봉우리로 옛 마을 모습을 그리며 자기가 살던 집이 어디쯤인지 수면 위에 지도를 그리며 고향 그리움을 달래는 것이다.
연 회장은 “북한에 고향이 있는 사람은 통일이라도 기다리겠지만 우리같이 수몰민 가족들은 다시 고향땅을 밟을 수 있다는 기대도 할 수 없어 멍하니 대청호만 바라볼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연 씨는 대청호 건설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 향우회를 이끌고 있다.
누가 실향민 향우회를 만들자고 한 것도 아니지만 타지에서 대청호를 찾은 옛 고향 어른들에게 길안내를 하던 것이 자연스럽게 향우회까지 이르게 됐다.
지금은 대청호 수몰지역에 고향을 둔 100여명과 지속적으로 연락이 닿고 있다.
특히, 이들은 구정과 정월 대보름에는 대덕구 부소동 산 27번지에 있는 수령 300년 느티나무 앞에 모여 제사를 함께 지내는 것으로 고향 들판을 직접밟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고향을 잊지못하는 이들이 유일하게 서로를 위로하는 날이기도 하다. 또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시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동안 대청호 수몰지역을 알리는데 혼자 활약해 온 연씨에게도 고민이 생겼다.
옛 고향 어른이 찾아오면 대청호로 안내해 고향얘기를 나눈다. 집에서 함께 묵기도했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려니 힘에 부친단다.
연씨는 수몰민의 애환을 증언해 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수몰로 인해 이주한 지 올해로 29년째 되면서 당시를 분명히 기억하는 수몰민 1세대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청호 밑에 가라앉은 마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어요.언젠가는 저 푸른 호수 밑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가 올 까 걱정입니다” 연씨의 얼굴 한쪽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꿈속에 갔던 고향”
- 작시 연세호
꿈속에 갔던 고향
알듯말듯 그 오솔길
향수에 젖은 가슴 반겨주던 반겨주던 옛 친구들
꿈께니 만경창파 못잊을 건 정이라네
이들이 삵고 달아 모래알이 된다한들
그리운 옛 추억 그시절에 뛰놀던 곳
이 세상 어디에서 내 고향을 찾으리오
500년 살던 땅을 버린 곳이 어디있나
흙 한줌 풀 한 포기 선조들의 피땀인걸
어 죽어 황천가 그곳찾아 살으리라.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