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산천 닮은 마을... 그곳의 흙과 물로 예술을 빚다

고향산천 닮은 마을... 그곳의 흙과 물로 예술을 빚다

<일본도요산책> 6. 조선도공들의 수난

  • 승인 2009-11-26 10:07
  • 신문게재 2009-06-23 12면
  •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이야기는 이어진다. ‘사츠마’ 반도 서해안은 활등처럼 휘어서 기다랗게 남으로 뻗어 있고 ‘하시마자끼(羽島崎)’부터는 끝없는 모래사장이다. 여기에 후미진 ‘구시끼노’ 어촌이 나온다. 그리고 남쪽으론 ‘시마비라(島平)’라는 인적 없는 해변이 펼쳐져 있다. 조선도공들은 이곳 ‘시마비라’에 표착했다.

그것은 ‘불러도 대답 없는’ 황량한 풍경이었으리라. 그들은 ‘가고시마(鹿兒島)’가 어디인지 몰랐고 찾아갈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흰 옷자락을 날리며 모래사장을 헤맬 뿐이었다. 병든 자가 쓰러지면 아낙네는 호곡하고 그 애절한 울음소리는 해변을 뒤덮었다.


어떻든 그들 도공들은 ‘시마비라’에 표착했다. 모래사장은 여전히 그 모래사장이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그 중 몇 사람이 타고 온 뱃전에 매달려 ‘미친 듯이 배를 바다에 띄웠지만 작은 배는 물결에 밀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망향의 슬픔은 그들 각자의 집에 전승되어 지금도 가령(家靈)처럼 숨 쉬고 있을 것이다.

도중 병이 난 몇 사람은 이 모래사장에서 숨졌다. 일행은 유해를 언덕 위 솔밭 그늘에 묻었다. 죽은 이의 이름을 새긴 비(碑)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거기에 머물 수만은 없었다.

그 들판은 인적이 없는 황무지였다. 그들은 허가 없이 언덕에 오두막을 짓고 밭을 일궈 곡식을 얻어야 했다. 다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도자기를 굽는 일뿐이었다. 마치 그것이 본능인 것처럼 가마를 쌓고 산속에서 흙을 찾아내 그릇을 굽기 시작했다.

지금은 ‘모도츠보야(舊壺屋)’라는 이름만 남아 있으나 8년간을 그렇게 지냈다. ‘사츠마’ 영주의 정치 ‘애도(江戶)’ 중기(中期) 때의 협량(峽量)과는 달리 매우 너그러운 것이었다. 소문은 그 일대에 파다했다. 도공들은 광택이 나는 이상한 것을 굽고 있었다.

그래서 차츰 근처의 백성들이 구경하러 오게끔 되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아 무턱대고 일터 안에 뛰어 들어왔다. 도공이 틀 위에 흙을 놓고 ‘녹로(??)’를 돌리자 틀 위의 흙은 어느새 그릇 모양이 된다. 원주민들은 하도 신기해서 손으로 그것을 만져 보곤 했다.

▲ 원주민들의 작업 방해

거의 매일 같이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다. 말려도 통하지 않아 손짓발짓에 떠밀고 큰 소리를 치자 토민(土民)들은 떼 지어 몰려와 오두막을 허물어 버리고 갔다. 후일 ‘시마츠’ 관원이 이를 기록하기를 ‘원주민들이 번번이 흙발로 일터에 들어와 작업을 방해하자 언어불통(言語不通)이라 하릴 없이 손을 들어 그자들을 밀어냈다. 주민들은 그 날로 무리를 지어 일터에 난입, 보복을 했다.

이는 ‘게이죠’ 8년 12월의 일이다. 한인들은 그들의 압박에 못 이겨 유랑(流浪) 길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도공들은 ‘가고지마’ 부성(府城)에 호소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 장로(長老)가 앞장섰다. 그러나 이동이 급했다. 동지섣달 모진 추위 속에 제 각기 등에 짐을 지고 자리를 떠나야 했으니 사정은 매우 절박했다.

그들은 내륙지방 동쪽을 향해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불과 20리도 채 못가 앞서가던 이가 탄성(嘆聲)을 올렸다. 그 탄성은 차차 뒤쪽으로 퍼져나갔다. 고향산천과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이다. 활짝 제켜진 하늘 아래 밋밋하게 엎드린 언덕,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우거진 잡목, 고향인 남원성 밖과 너무도 흡사했다.

다행히 그곳도 황무지였다. 왜인도 보이지 않아 이곳을 제2의 거처로 삼자고 장로가 말했다. 바로 그곳이 ‘나에시로가와(苗代川)’였다. ‘사츠마’에선 이곳을 ‘노시로꼬’라고 부른다. 내도 없는데 내천(川)자가 붙은 것은 어떤 연유일까.

지하수도 귀했다. 우물을 파도 좀처럼 수맥이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옛날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는지 모른다. 번(藩)의 기록은 이때 도공들의 모습을 이렇게 남기고 있다. ‘나무 밑에 의지하는 그 정경이 매우 처량했다. 여기서 꽤 멀어진 곳에 왜인들 부락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도공들에게 이따금 먹을 것을 주었다하니 바닷가 주민과는 딴 판으로 인정이 야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기록에는 또 ‘도공들은 그 후 오두막을 짓고 인근 농가에 의지, 약 3년을 지냈다’고 적혀있다.

약 3년이란 어정쩡한 숫자, ‘가고지마’의 관(官)이 도공들에게 이토록 무심했던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그 하나는 당시 ‘사츠마’ 위정자는 군사와 외교엔 기민했으나 산업, 행정에 깊이 관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 君父의 원수와는 ‘불구대천’

이곳 ‘나에시로가와’ 실정이 겨우 ‘시마츠’ 번주(藩主)의 귀에 들어갔다. 당초에는 불쌍하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모두 가고지마 성내에 거주토록 하라. 주거도 제공하고 보호해주도록.’ 그러나 이 명을 받은 관원이 도공촌을 찾았으나 뜻밖에도 그들은 이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높으신 은혜 고맙기 그지없사오나 ‘가고지마’ 성내에는 아니 가겠습니다.” 장로가 그들을 대표해서 거절했다. 도공들이 완고하다는 걸 들고는 있었지만 이 말에는 관원도 아연 실색했다. ‘위의 명령이시다.’ 으름장도 놓아보았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관원이 돌아가 그 사유를 분명히 알기 위해 통역을 대동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가고시마’ 성내에는 또 다른 경로로 이 나라에 온 한인이 상당수 살고 있었다. 관에서는 이 거리 한 구역을 ‘고려마을(高麗町)’이라 하여 거주지로 정했다. 통역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도공들은 ‘주가전(朱嘉全)’이라는 자가 있다고 들었다.

그는 반역자였다. 군부(君父)의 원수와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다고 장로들은 가공할 말을 했다. 그들이 말하는 반역자 ‘주가전’은 같은 전라북도 남원태생으로 관의 녹을 먹던 자였는데 ‘시마츠’군이 침공하자 동족을 버리고 그들에게 길안내는 물론 성안 사정을 고자질 한 자였다.

싸움이 끝나 왜군이 철수할 때 ‘주가전’은 당황했다. 모국에 남아 있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시마츠’에게 호소, 그의 가신(家臣)이 되어 일본에 건너와 일본 성(姓)까지 얻어서 ‘가고시마’에 살고 있었다. 그 소문을 장로들은 알고 있었다.

‘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들에게 저렇게 서릿발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관원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또 하나의 이유는?”하고 거듭 물었다. 장로들 표정이 갑자기 흐려졌다. ‘고향이…. 고향이 그립소이다.’ 그 말을 들은 관원은 한인들이 단순하다는 생각에 마음 놓고 무릎을 부채로 탁 치면서.

‘들으라, 이곳서 ‘가고시마’까지는 겨우 60리, 그 60리 이편이면 망향의 정이 달래지고 60리 저쪽이면 그게 안 된다니 지나친 응석이 아니냐’고 다그쳤다. 장로들은 고개를 저어 그게 아니라고 항변했다. “저 언덕을 보시오. 언덕의 이름은 산지라꾸(山侍樂)라고 하오.” 그들은 말하기를 저 언덕에 오르면 동지나해가 보인다며….

▲ 陶土를 찾아 자기를 굽다

그 아득한 저쪽에 조선의 산하가 있다. 우리는 천운(天運)을 놓쳐 조상의 무덤을 떠나 이 나라에 끌려왔으나 저 언덕에 제단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 먼 조국의 산하도 감응하며 그곳에 잠든 조상의 넋을 달랠 수도 있으리라.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에 관원들은 할 말을 잊었다. 그대로 ‘시마츠’ 공에게 전할 밖에 없었다. 그즈음 ‘시마즈 요시히로’는 ‘가지키(加治木)’, 성관(城館)에 있었다. 관원의 보고를 듣자 의외로 화도 내지 않고 무릎을 치면서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면서 다시 영을 내렸다.

‘그렇다면 ‘나에시로가와’에 토지와 집을 주라. 녹(祿)도 주고 부족한 점은 언제나 말하도록 일러라.’ 이로 인해 그들 ‘시마비라’ 표착민 열 일곱성(姓)의 신분이 결정되었다. ‘조선계열’이라는 호칭 아래 계급을 껑충 올려 무사(武士)와 동급으로 예우(禮遇)한 것이다.

대문을 둘 것과 담을 쌓을 것을 허락했고 그 위에 ‘무도(武道), 사범에 입문할 수 있는 자격’도 부여했다. 단 무사라고는 해도 군역(軍役)에 복무할 의무는 없고 의관(醫官)과 동격으로 이를테면 비전투원인 향사(鄕士) 대우를 받게 된다.

그들 도공의 작업이 시작됐다. 우선 도토(陶土)와 유약(釉藥)의 원료인 돌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그것이 좀처럼 발견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이나 중국과 달라, 이 나라 산하에는 그런 흙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해서 한 때 실망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 무렵 ‘시마츠’공은 이상하리만큼 그 일에 관심을 보였다. ‘나라 안을 샅샅이 파헤쳐보라’고 영을 내려 지리에 정통한 과원을 도공마을로 보내 함께 도토 탐색에 나서도록 했다. 마침내 이 방면에 가장 노숙한 ‘박평의(朴平意)’와 그 아들 ‘박정용(朴貞用)’이 그 흙을 찾아냈다.

백토(白土)였다. 조선 원래의 백자를 만들어내는 그 흙이 ‘이부스끼군(揖淑郡)’, ‘나리까와(成川)’ 마을과 ‘가와베군(川邊郡)’, ‘가세다(加世田)’ 마을 ‘쿄오노미네(京の峰)’에서 발견되고 유약에 쓰일 돌과 졸참나무도 같은 ‘이부스끼군’ ‘카고무라(鹿籠村)’에서 찾아냈다.

박평의가 그 흙으로 백자를 구워 상납하자 ‘시마츠’는 크게 기뻐하며 ‘조선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흰색은 이조자기의 특색이다. 난백(卵白), 회백(灰白)이 있어, 그 어느 것 할 것 없이 흰색에도 이렇게 복잡한 색상이 있나 싶도록 감칠맛 나는 빛깔로 이조 전기(前期) 것을 구워냈다.

그러나 박평의가 구워낸 ‘시로사츠마(白薩摩)’는 시마츠공의 말대로 비슷하기는 하나 이조(李朝)의 그 흰 빛깔은 아니었다. ‘박평의’는 할 수 없이 도기(陶器)를 구워낼 때 이 백도(白陶)를 가능한 한 백자에 가깝도록 하기 위해 살갗을 엷게 했다.

이 때문에 이조가 개척한 흰 빛과는 다른 전혀 독자적인 이른바 ‘시로사츠마’를 ‘박평의’가 이루어냈다. ‘시마츠’는 그것을 대량생산해서 새 시대의 지배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헌납했고 그 밖에 여러 다이묘(大名)에게 선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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