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는 별다른 설명글과 안내판도 없이 잔디밭 가운데 불쑥 솟아 있어 보물 209호인 동춘당을 찾고서도 못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 송씨삼세정려구허비 뒤로 대전시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는 송용억 가옥이 보인다. |
이 정려비는 원래 송촌동 동춘당에 이르는 길가에 있었는데 1861년 후손들이 이사하면서 정문도 함께 대화동으로 옮겨가자 그 터를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정려에 대해서는 도암 이재가 지은 ‘송씨삼세정려기’, 금곡 송래희가 지은 ‘송씨삼세정려이건기’, 그리고 송학순이 지은 ‘송씨효자정려유허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재가 지은 송씨삼세정려기를 보면 송경창은 왜적이 81세의 부친을 해하려하자 온몸으로 막았는데 왜적이 마구 휘두르는 칼에 오른손이 끊어져 피가 땅에 흘러도 왼팔로 아버지를 안고 놓지 않아 부친을 살렸다고 한다.
또 송경창의 손자인 시승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그의 부친 계록이 병들어 사경에 있을 때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받들어 아버지의 수명을 10일 동안 연장했으며 모친 윤씨가 병으로 누워 몇 십 년을 지나는 동안 매일 새벽에 하늘을 향해 울면서 기도해 몸으로써 대신하기를 바랐다.
송시승의 아들 유관은 12세 때 부친이 전염병으로 죽자 혼자 능히 예에 의해 치상을 하였으며 모친의 병에 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받들었다.
이들은 모두 쌍청당 송유의 후손이며 3세가 모두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잘 섬겨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고 그 사적이 국가가 반포한 ‘삼강행실록’에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 한남대 한기범 교수는 “동춘당공원 내에 송씨삼세효자정려구허비가 있으면서도 제대로 조명이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면서 “요즘처럼 예와 효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세태 속에서 부모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송씨 3세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효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선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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