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율로 연합비뇨기과 원장 |
물론 내가 노래를 행복하게 부를 수 있도록 탄탄히 받치고 있는 나의 모든 환경을 더욱 사랑하지만 말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학교를 가는 도중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떤 악기인지도 알지 못하였고 그때까지 살아오는 동안 처음 들었던 소리였다.
며칠간의 노력 끝에 그 소리의 주인공이 바이올린임을 알아내었고 당시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님의 형편으로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괴물을 얻기에 고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큰누님이 작은 월급을 쪼개어 사주시기는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레슨비 때문에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몇 가지 일들을 돌이켜 보면 어려서부터 내 몸속에 음악에 대한 작은 열정이 잠재해 있었던가 보다. 고등학교시절에는 음악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었다.
한번은 음악실기시험으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나는데 ‘선구자’를 성악형태로 불렀던 나와, 날라 가는듯한 목소리의 유행가 형태로 불렀던 다른 친구가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었다. 하지만 내가 성악가의 모습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을 때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고 어떤 아이들은 의아한 눈초리이기는 하지만 진지하게 경청했다.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으로 보아 나에겐 매우 인상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일찍이 음악에 접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가 약간은 있었지만 이러한 경험이 없었던 여러 아이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분위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작은 음악행보는 음악대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의과대학 학생시절 합창단을 창단하여 지휘를 하였고 음악제의 총연출을 맡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각할수록 더욱 새록새록하다.
공부를 소홀히 하여 음악활동이 성적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지만 지금 마음속에 훈훈히 남아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공부보다는 취미생활이었음이 확실하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 모교에 의과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내가 창단했던 합창단의 지도교수를 통해 후배요 제자들에게 빠뜨리지 않고 강조하였던 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취미는 직업은 아니지만 자기 내면을 성숙시키고 삶을 풍성하게 하기위해서 하는 것이며 이렇게 하기위해서는 전문가수준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추어야 되고 이에 따르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된다. 하지만 이후에는 자기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된다는 지론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제는 대학을 나와 자그마한 개인병원을 운영하면서 합창단후배들과 함께 남성 중창단을 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매주 2시간씩 빠지지 않고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가며 진지하게 연습하고, 급기야는 예술의 전당의 연주를 포함하여 매년 수차례의 초청연주까지 하면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고 있는 모습들은 짧은 시간 내에 이룩된 것은 결코 아니다. 각자 오랜 세월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추구해왔던 그 어떤 것을 이제는 함께 행복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이 대에 새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누구나 세상의 수레바퀴에 물려 정신없이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시절이 있고 무언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명예도 돈도 아니다. 우리의 내면을 성숙시키고 풍성하게 해주는 그 무엇인가를 지금이라도 시작한다면 결코 늦지 않을 것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