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 서거 직후 총알이 뚫고 지나간 창을 통해 본 경교장의 뜰로 깨진 유리창에 총구멍이 선명하다. 사진작가 칼 미이던스가 김구 서거 직후 찍은 사진이다. |
현장에서 체포된 안두희는 우발적 단독범을 주장했다. 배후는 없다는 얘기다. 해묵은 의혹일지도 모르는 김구의 암살배후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그의 죽음이 여러 가지 숙제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구의 암살배후는 ▲미군방첩대(CIC) ▲특무대장 김창룡 등 군부 ▲백의사 등이 거론됐다. 김구의 암살범 안두휘는 1992년“특무대장 김창룡의 지시로 백범을 암살했다”고 증언했다. 김창룡은 1940년 일본 헌병대 출신으로 수 많은 독립운동가를 잔인하게 고문해 악명을 떨친 혐의로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군인 가운데 대표적 친일파로 분류됐다. 지금도 그가 묻힌 대전 현충원에는 시민단체들의 묘지 이장요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안두휘의 증언에는 CIC도 등장한다. CIC대령이“서북청년단 사무실에서‘블랙타이거’를 제거하라는 언질을 주었다”고 밝혔다. 블랙타이거란 CIC가 김구를 지칭하는 은어다. 더욱이 안두희는 당시 CIC정보요원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는 김구 암살에 미국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또 다른 배후로는 남한의 단독정부수립 과정에서 극우 테러를 자행한 백의사라는 단체가 지목됐다. 안두희 역시 이단체에 가입해 있었다. 백의사(단장 염동진)은 해방 직후 대 공산주의 테러활동을 벌였는데 좌우를 가리지 않고 단독정부를 지지하지 않은 정치지도자에 대한 청부암살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 암살당한 정치인은 모두 모스크바삼상회의에 긍적적 태도를 보이거나 남북간 대화와 협상을 주장했던 인물들이다.
이 과정에서 대원인 안두휘에게 암살이 지시된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 조지 실리(George E. Cilley)소령이 김구 암살 3일 뒤 작성해 미 육군 정보국장 앞으로 보낸 문건이 공개돼 제기됐다.
▲ 서울운동장으로 운구되는 김구의 장례식 행렬. 이날 서울의 모든 상가는 김구의 장례에 맞춰 철시됐다. |
보고서에서 실리는“백의사 단장은‘악질적인(The Most Malignant)’인물의‘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묘사되고 안두희(Ahn Tok Hi)는 이 비밀조직(백의사)의 구성원이자 이 혁명단 제1소조 구성원”이라며“나는 그를 정보원(informer)으로, 뒤에 한국주재 CIC의 요원(agent)으로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실리 소령은“안두희는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며“2명의 저명한 한국 정치인인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도 이 지하조직(백의사)의 구성원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백범기념사업회는 1996년 김구선생 암살 진상규명조사보고서에서“백범 암살은 면밀하게 준비 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분담된 정권적차원의 범죄였다”며“안두희는 그 거대한 조직과 역활에 암살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이어“암살의 계획과 조율은 김지웅, 암살하수인관리는 홍종만으로 이들은 모두 정권차원의 비호를 받았다”며“일차적 배후는 군부쪽으로 장은산은 암살을 명령하고, 사건 이후 김창룡의 적극 개입과 채병덕 총참모장, 전봉덕 헌병부사령관, 원용덕 재판장, 신성모국방장관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했다”고 보고했다.
김구 암살의 가장 큰 쟁점은 미국과 이승만의 개입이다. 물론 이에 대해 아직 명백하고 확실한 팩트를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암살사건에 최고위층과 미국의 지시명령이 확인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만 미국과 최고위층 자체가 상황을 만들기에 이들의 도덕적, 상황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한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김구는 스스로 마지막 독립운동이라고 선언한 민족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김구가 살아있었다면 민족상잔의 비극을 막을 수있지 않았을까? /맹창호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