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다음날인 9월 3일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명의로‘국내ㆍ외 동포에게 고함’을 통해 당면정책 14개 조항을 발표한다. 주요내용은 즉각 입국해 과도정권을 세우고 임시정부를 넘기겠다는 점과 동포의 안전한 귀국과 매국세력에 대한 단호한 응징을 발표한다. 해방을 맞은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가 추진할 과제를 국민들에게 천명하고 현 정부형태를 유지해 환국한다는 방침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환국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국제관계는 물론 현실적 문제도 심각한 걸림돌이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충칭에 있었는데 환국을 위한 교통편은 물론 막대한 경비가 필요했다.
이같은 애로는 결국 중국국민당과 협의해야했다. 중국은 사실상 임시정부를 인정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아 정부대 정부로 교섭이 어려웠다. 임시정부는 환국에 앞서 중국에 4가지를 요청했는데 ▲임시정부의 국제적승인 ▲400만 교포의 안전 ▲일본군내 한국인처리 ▲환국에 필요한 교통 및 경비였다.
연합국을 주도한 미국과도 별도의 교섭을 추진하거나, 중국을 통해 다각적인 협의가 진행했는데,‘미군의 활동에 협력하고 원조한다’는 전제하에‘임시정부의 승인과 국내에서 정부활동의 보장’을 요구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 역시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을 원하는 여론을 국무부에 보고하고 활용방안을 건의했다.
임시정부 환국이 본격화되면서 가장 큰 애로인 교통편이 가닥을 잡았다. 귀국노선은 충칭에서 상하이로 이동해 국내로 들어가는 것으로 상하이까지는 중국이, 나머지 서울까지는 미국이 이를 부담하기로 했다. 환국은 1, 2진으로 나눠 신청을 받고 김구 등 국무위원과 가족이 없는 원로들은 먼저 비행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환국에 앞서 여러기관이 주최한 환송연도 열렸는데 중국국민당은 환국자금 1억원과 미화 20만달러를 지원하고 장제스(蔣介石)가 임시정부 주요 요인 60여명을 초청했다. 중국공산당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송별연을 베풀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 인사들을 군정의 점령점책에 활용하는 방안까지 세웠지만 개인자격으로만 환국이 가능하도록 했다. 더욱이 미국은‘개인자격의 귀국’이라는 서약서에 국무위원과 독립운동가들의 서명을 요구했다. 임시요인들은 분노했고 환국은 난항에 부딪쳤지만 결국 현실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11월19일 서약서를 제출해서야 미국은 15인승 비행기 1대를 상하이로 보냈고 23일 김구 등 1진 일행 15명은 굼에 그리던 해방된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임시정부 직원과 가족등에 대한 환국도 함께 진행됐다. 당시 중경에는 독립운동 관계자가 모두 501명이 거주했다. 이들 역시 임정요인과 마찬가지로 일단 상하이에서 국내로 입국키로 했는데 귀국은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비행기는 물론 버스나 선박 어느 교통수단도 제대로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교통편은 1946년이 되서야 처음 마련됐다. 남경까지 갈 버스 10대를 구한 임시정부는 1월16일 250명을 태우고 출발해 한달 여인 2월 19일에야 상하이에 도착할 수있었다. 이후 2, 3, 4차로 나눠 배를 이용한 귀국이 진행됐다. /충칭, 상하이=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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