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일구 호서대 총장 |
한참을 기도하다가, 가까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게 웬일인가. 눈앞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원주민들이 줄지어 급류(急流)를 건너는데, 저마다 무거운 바위를 하나씩 가슴에 안고 천천히 물속을 걷는 게 아닌가. 얼마나 무거운가. 얼마나 둔한가. 그러니 급류를 건너는 진행이 얼마나 더딘가. 하지만 원주민들은 그렇게 줄지어 위기의 경계를 넘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가 무게를 잃고 한없이 경박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무엇이든 무거운 것은 놓자!” “버거운 것은 벗자!” “어려운 것은 버리자!” 그래서 대학원에서는 학생들이 어려운 전공을 기피한다.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돈 버는 직업만을 고집한다. 직장생활을 하는 중 조금만 부담스런 과제를 접하면 손사래를 친다. 조금만 책임질 일이라도 생길 것 같으면 애초부터 딴전을 피거나 남의 일인 양 애써 무관심하려 한다.
이러다가는 궂은일을 할 사람이 모두 없어지고 책임질 사람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희망의 원인이어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희망의 싹을 누르는 슬픈 현실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사이 우리의 가치와 윤리는 흔들리는 터전 위에 놓였고, 우리의 정신과 영혼은 이념과 시대정신의 급류에 휩쓸리고 있다.
절망이란 당면한 어려움 앞에 이길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란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신념이다. 희망은 문제를 푸는 힘이 수학보다 더 위대하다고 하였다(빅토르 위고).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희망의 가능성을 어디서 찾을까?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예의 선교사는 무거운 바위를 가슴에 안고 계곡을 건너는 원주민들을 보고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저마다 하나씩 떠안은 저 바위의 무게로써 중심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그 세찬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안전한 땅으로 건널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희망은 일상의 시간이 영원과 속삭이는 대화라 하였나? 어느 날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장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막 8:34). 그 유명한 ‘자기 부인’(self denial)과 ‘십자가’(cross bearing)의 명령이다.
자신의 책임은 외면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어마어마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그 가벼운 영웅주의를 버리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당신의 길은 나 아닌 남을 위한 길, 그래서 남을 위해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를 지는 길, 만인의 질고를 스스로 내 몸에 짊어지고 가는 길... 그러니 누구든지 참된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마다 마땅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묵묵히 걸으라는 명령이다.
혼란도 분열도 가벼움에서 온다. 모두를 표류(漂流)케 하는 지도자의 무책임성도 참을 수 없는 경박성에서 기인한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멍에가 급류를 견디는 무게일 수도 있다. 질고를 앓은 이가 성숙하고 고난을 겪은 이가 동정심이 큰 법이다. 사도 바울은 권면하였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사람이 혼돈의 탁류(濁流)가 흐르는 세상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영웅주의의 가벼움을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 사회가 이념의 소용돌이에서 안전하게 벗어나려면 모두가 무거운 십자가를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 가치관과 시대정신의 급물살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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