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교사가 아닌, 교육청에서 행정업무를 보고 있는 일반 교육행정 공무원이다.
한 때 ‘선생님’을 꿈꾸었고 그랬기에 대학에서 관련 과정을 이수하려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출신과가 실제 학교 현장에서 퇴출(?)되고 있는 과목인데다가 쟁쟁한 학교의 거물급 경쟁자들이 넘쳐나 엄두에 두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에 대한 꿈을 접어 본 적은 없다.
교육행정 공무원을 준비하면서 나름대로의 로드맵으로 세운 것이 ‘정보화 전문 강사’였고, 나는 그 꿈을 빠른 시일 내에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강단에 서고 있다. ‘강단’에 서는 나는 고민이 없다. 오롯이 강단에 서서, 지식을 갈구하는 대상자들을 상대로 지식을 전파하고 내 지식을 잘 가공하여 멋들어지게 보여주면 그 것으로 족할 뿐이다.
수업을 듣는 자의 성격이 삐딱선을 타 잘못된 길로 가든 말든 나는 관여하지 않는다. 수강생들끼리 서로 다툼을 해서 내가 바로 잡아주어야 할 이유도, 명분도 나에게는 없다.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는 자에게 내가 굳이 끼어들어 훌륭한 카운슬러가 될 필요도 나에게는 존재치 않는다. 나는 다만, 오로지 지식을 훌륭히 전파할 의무가 있는 강사에 불과하다.
강단은 그렇다.
사명감. 글쎄, 무슨 사명감이 필요할까? 지식전파를 위해 교안을 정성껏 작성하고, 수업 진행을 물 흐르듯 무리 없이 진행하면 그만일 뿐이다. 수업 진행이 매끄럽지 못하면 강사로서의 생명은 금방 끝이 난다. 강사는 지식전파에 대한 의무가 있을 뿐, 수강생들의 생활지도, 진로지도 등에 대한 의무도 권리도 존재치 않는다. 솔직히 부담 없어 좋다.
‘강단’에 서는 자들이 가끔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교단’과 ‘강단’을 동일시하는 커다란 착각. 큰일 날 소리다.
교단은 다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다. 그러나 지식전파만이 교사의 할 일은 아니다.
교단에 서는 자는 지식전파는 물론이요, 학생들의 생활지도와 진로지도 등이 뒤 따르게 된다. 때로는 훌륭한 부모이자 벗도 되어야 한다.
교단에 서는 자의 일거수일투족이 학생들에게 그대로 카피되어(때로는 그 보다 더 진화되어)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고, 나아가 그 사람의 인성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만큼 부담감도 더 많고, 나름대로의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닌, 교사 스스로 기피직종에 근무하고 있다는, 겪어보지 않은 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강단에서는 수업을 듣는 자를 ‘수강생’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들이 수강을 종료하고 나면 ‘수료생’이라 불린다. 그 들을 가르쳤던 자는, 그냥 듣기 좋은 ‘선생님’이라는 단어로 불린다. ‘선생님’이라는 명칭도 사실 과분하다.
교단에서는 수업을 듣는 자를 ‘학생’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들이 졸업하고 나면 ‘제자’가 된다. 아울러 가르쳤던 자는 ‘스승’이 된다.
교단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공식적인 통로를 거쳐 들어가야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선생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반대로 강단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과정은 필요 없고, 일반적인 도덕성(때로는 이것도 필요 없다)과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성만 갖추면 ‘강사’가 될 수 있다.
‘강단’에 서는 자가 감히 ‘교단’을 우습게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 계속 주절거릴 필요가 있을까?
교단과 강단은 다르다. 비교할 필요도 없이 완전히 다르다. 이 명제를 잊지 말자. 그리고 감히 ‘교단’과 ‘강단’을 동일시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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