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경 건양대학교 기업정보관리학과 |
따라서 두 단어는 주로 적용되는 대상이 조금씩 다를 뿐, 충성과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 내가 군 생활을 하던 전방부대 내무반에는 큰 액자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충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거나 보이기 시작하면 변질되었거나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4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까지도 이 글을 잊지 않고 좋아 한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에게는 위 글의 ‘충성’을 ‘사랑’으로 바꾸어 되뇌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충성이 눈에 보인다는 것은 진정한 마음보다 의도적인 행동이 앞서는 것을 의미할 텐데, 과연 사랑도 눈에 보이면 변질되었거나 변질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랑이 눈에 보인다는 것은 어떤 모습을 의미할까?
대학교수를 하면서 나는 캠퍼스 내에서 남·여 학생들이 서로 좋아하며 지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소위 캠퍼스 커플라는 애칭 아래 항시 손을 잡고 다니거나, 강의실에서는 꼭 옆자리에 앉고, 같이 시험공부 하고, 심지어는 커플링에 커플티셔츠까지 입고 다니기도 한다.
그야말로 둘이 좋아(사랑)하고 있음을 남들에게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듯 내놓고 자랑하기도 하고, 때론 다른 친구들로부터 부러움도 사며,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니, 나처럼 나이가 든 교수 입장에서는 관심 반, 격려 반, 염려 반의 마음으로 젊은 그들을 지켜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 친구들은 저렇게 항상 같이 다니고 좋아하니 졸업 후에도 서로 잘 지내겠지?’, ‘서로 장래는 약속한 사이일까?’, ‘결혼까지도 성공하겠지? 아니, 꼭 성공해야 할 텐데 · · ·’ 때로는 노파심까지 생기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교수생활 20년이 가까운 지금까지 그렇게 요란(?)하게 사랑한다며 지내던 학생들이, 졸업 후까지 교제를 계속하고 결혼에 골인한 경우는 단 한 건도 보지 못했다.
우연일까?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을 테고, 또 나만의 우연이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나에게는 단 한 건도 볼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와는 반대로, 가끔 주례를 부탁하러 오는 제자들이나, 결혼을 한다며 인사하러 오는 졸업생들 중에는 전혀 뜻밖의 커플을 맞이하곤 한다.
학교시절에는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아 가까운 사이인지 몰랐던 학생들이 영원한 커플이 되어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네들은 언제 교제를 했어? 학교에서는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았었는데”
축하 겸 농담 삼아 하는 질문에, 대답은 주로 이렇게 의젓이 돌아온다.
“그게 뭐 소문내고 자랑할 일인가요? 가까운 친구들도 거의 잘 몰랐어요.”
그렇다! 소중한 것일수록 우리는 깊이 간직하고 남에게 함부로 보여주기를 조심한다.
누가 자기 집에 금송아지가 있다고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며 떠들고 다닌다던가.
남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당사자 간에만 서로 마음으로 느끼고 눈빛으로 확인하면 그 것으로 족한 것이다.
둘이 사랑하고 있음을 애써 남들에게 보여주고 요란스럽게 자랑할 필요는 없다.
사랑이란 성경 속의 선행처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할 만큼 그렇게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거나 보이기 시작하면 변질되었거나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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