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유일한 대표임을 자임하는 임시정부가 풀어야 했던 노선문제 역시 서구의‘자유민주주의’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전래된‘사회주의’의 영향에 대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의 문제였다. 당시 독립운동은 두 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항일투쟁으로 전개됐는데 이를 하나로 묶어야 더 큰 힘과 효과가 기대됐다.
따라서, 항일독립운동의 주체가 온겨레임을 전제로 하는‘민족주의’노선과 무산계급을 동력으로 믿는‘사회주의’노선간 통일단결을 이뤄야 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가장 큰 숙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민족’과‘계급’은 서구로부터 들어온 개념이다. 이를 독립운동에 편향적으로 적용하면 우리의 특수한 사정 즉,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민족과 계급이 모두 일제의 탄압과 착취를 받는다는 점을 제대로 풀어나갈 수 없도리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충돌까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서구사고의 틀속에 맑스주의자들은 식민지의 이중적 모순(민족과 계급)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고, 임정요인들로서는 일제의 침략에서 희생당한 민족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임시정부의 고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민족혁명의 방략으로 지도자 중심의 대중투쟁과 조직중심의 민족대단결의 연합전선 가운데에서 선택이 요구됐다.
이같은 대내ㆍ외적 상황에서 정치, 경제, 교육에 있어 평등을 주장한 균권(均權)·균부(均富)·균학(均學)의 삼균주의는 홍익인간은 우리의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했고 독립운동이란 실천을 통해 완성됐다.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한 건국강령은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계획이지만 동시에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이었다. 일제의 패망을 앞두고 좌우 독립운동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목표였다. 임시정부의 삼균주의가 우리 헌법을 매개로 미래 통일한국의 이념으로 이어지도록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건국 90년
우리역사는‘대한제국’에서‘대한민국’으로 계승된다.임시정부는‘대한’이란 명칭은 그대로 사용했지만‘군주제’를 폐지하고‘민주제’를 채택해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라는 민족사의 신기원을 열었다. 때문에, 대한민국의 역사를 언급하고 기원을 따지려면 임시정부가 우선 논의될 수 밖에 없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금이 갈 수밖에 없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도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 식민지의 역사로 남게돼 먼 훗날 일본이 한반도를 자신들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빌미를 주게 된다.
우리의 헌법에서는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유효적절하게 대응했다. 제헌헌법 전문을 살피면‘대한국민은 기미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이라고 임시정부에서 정식정부를 수립한 근거를 밝혀 놓았다.
당시 이승만은 국회 개회사를 통해“임시정부를 계승 재건해 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하고, 그 내용을 제헌헌법 전문에 담도록 요청했다. 현재의 6공화국 헌법 전문 역시‘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중략) 계승’한 사실을 제시했다. 정통성의 근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헌법재판소에서도“대한민국은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의 공헌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중략)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해 응분의 예우에 대한 헌법적 의무를 지닌다”고 판시하고 있다. 반민족자 후손이 친일조상의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에서도 법원은“대한민국은 헌법전문을 통해 임시정부를 계승함에 따라…”라며 친일재산의 몰수는 적법함을 지지하고 있다.
더욱이 임시정부는 그 수립절차나 기구, 주권의 효력 등에서도 정부로서 적법성을 갖는다. 우선 광복군이란 국군을 갖고 있었고 의회인 임시의정원은 지역대표를 선출해 입법활동과 시대에 맞도록 5차례 임시헌법을 개정했다. 행정부에는 내무, 외무, 군무, 법무, 재무, 선전, 문화부등 7부의 행정기관이, 대통령 혹은 주석으로 수반을 두었다. 국민, 주권, 영토 역시 헌법으로 정하고 있다.
실효적 지배를 얘기하는 일부의 주장은 현재의 대한민국조차 위태롭게 할 뿐이다. 대한민국은 헌법에‘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영토를 규정했지만 휴전선 이북에는 국민, 주권, 영토 모두 실효적지배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정부는 2차례로 하나는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였고, 다른 하나는 1948년 수립된 정식정부였다. 대한민국 관보 1호에는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연호가 명기돼 있다. 1919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역사는 올해‘임시정부수립 90주년’이 아니라‘대한민국 건국 90주년’의 해이다.
▲통일 대한민국의 법통으로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며서 임시정부는 민족독립국가 성립이 지연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미국과 영국이 한반도 식탁통치를 준비하고 있음을 감지됐기 때문이다. 영국은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이 식민지 인도의 독립운동을 자극할 것을 우려했다. 미국 역시 필리핀의 기득권을 주장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 미국, 영국, 중국의 루스벨트와 처칠, 장제스(蔣介石)는 회담을 열어 카이로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에는 다행히 중국의 강력한 지원으로 한국의 자유독립국가가 결의됐다. 하지만, 신탁통치를 암시하는 문구가 슬그머니 들어가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제기한‘적당한 시기’가 문제였다. 당시 이 문구가 38선이란 분단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일정기간 외세통치를 의미했다. 임시정부는 일본패망과 함께 즉각독립을 주장하는 성명을 냈지만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일본패망과 함께 연합국은 한국을 일정기간 보호하고 독립을 시키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결정했다. 우리민족의 비극도 함께 잉태됐다. 미ㆍ소 각기 다른 체제의 국가가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것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상륙해 적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어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는 미ㆍ영ㆍ소ㆍ중이 5년 이내의 기간동안 한국에 신탁통치를 결정한다. 군정과정을 거쳐 폴란드방식의 통일된 임시정부로 수립시키려 하는 것이란 해명이 있었지만 새로운 외세에 의해 점령당한 조국이 분단되는 상황을 임시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탁통치는 외세와 결탁하거나 친일세력에 의해 남과 북이 단독정부수립 움직임으로 변질돼갔고, 사상적 대립으로 격화됐다. 임시정부를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고 김구는‘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을 통해“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운는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며 단정수립을 거부했다. 남쪽에서 정부를 세우면 북쪽에서도 정부를 세울 것이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질게 자명하다는 것이 김구와 임시정부의 한결같은 지적이었다.
이 같은 노력에도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선 대한민국이 수립됐다. 북에서도 기다렸다는 듯 한달도 안된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남과 북은 김구의 우려처럼 분단이 고착화 되는 가운데 백범의 서거 1주년을 하루 앞둔 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의 비극까지 격는다.
이후 60년이 되도록 민족은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최근 10여년째 이어오던 화해와 협력분위기는 핵을 둘러싼 남북의 대결구도로 새로운 긴장을 조성시키고 있다. 통일에 대한 논의조차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임시정부는 일제와 전쟁의 와중에서도 줄기차게 좌우합작을 추진했고, 결국에는 이를 달성했다. 합작의 목적은 민족통일이었고, 민족통일의 목적은 독립자주의 정권을 수립함에 있었다. 민족통일을 이루지 못한 우리에게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완전한 승리는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으로 그리고 통일 한국으로 법통이 이어져야 한다./충칭=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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