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강(總綱), 복국(復國), 건국(建國)의 3장 24항으로 구성된 건국강령은 건국에 따르는 민주적 절차와 제도적 원칙으로 해방 이후 수권기관의 골격까지 제시됐다. 이는 김구와 안창호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건국강령의 사상적 기초는 조소앙의 제창으로 정치, 경제, 교육에 있어 평등한 균권(均權)·균부(均富)·균학(均學)의 삼균주의가 채택됐다. 이는 1944년 제5차 임시정부 개정헌법을 통해 법제화됐고, 해방 후 1946년 3월 행정연구위원회에 의해 제헌의 모체가 된‘한국헌법’에 그대로 연결됐다. 지금도 헌법전문의‘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라는 대목 등은 제6공화국 헌법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강용에 의해 임시정부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함으로써 건국강령은 분단과 미군정체제하에서 명목으로만 존재하게 됐다. 특히, 백범 김구의 암살을 계기로 더욱 철저히 배제됐다. 친일파의 농간으로 김구 서거(1949년 6월 26일) 두 달 만인 8월 말 반민특위가 해체된 것은 대표적 사례다.
▲ 1945년 11월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한 임시정부 요인들<왼쪽 사진>. 환국을 앞둔 1945년 11월 3일 충칭 임시정부 청사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임시정부 요인들. |
반민특위는 8개월간 친일행위조사 682건을 조사해 408건의 영장을 청구하고, 검찰송치 559건, 기소 221건을 처리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풀려났다. 석방이유는‘혐의 없음’또는‘무죄’였다. 재판에서 실형선고는 7명에 불과했지만 이마저 감형이나 형 집행정지로 모두 풀려났다.
반면, 북한은 정권 수립 전에 친일파들을 철저히 숙청했고 그들의 재산을 모두 환수했다. 북의 친일파들은 친일청산을 주저하던 남한으로 넘어와 반공을 등에 업고 또 다시 세력을 형성했다. 북한이 UN총회의 승인으로 당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된 남한에‘정통성이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이유 중의 하나다.
역사에 있어 가정이란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지만 임시정부가 제정한 건국강령 가운데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한 실천과제가 제대로 실현됐다면 지금까지 이러한 공세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수십년째 지루하게 이어지는 친일청산의 논란도 일찌감치 종지부를 찍을수 있었다.
▲임정의 건국강령은 미래의 자산
2007년 5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왜곡된 민족사에 모처럼 통쾌한 결정을 내렸다. 이완용을 비롯한 대표했고 단죄를 위해 무려 100년이나 참아온 것이지만 반민족자에게 내려진 역사의 심판이자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측면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재산환수는 최근까지 2년 여 동안 93명의 친일반민족자와 그의 후손으로부터 1121필지 770만㎡(추정시가 1500억)로 확대됐다. 일본인 명의의 빼앗긴 토지 881필지 34만㎡도 이 기간 동안 찾아져 귀속재산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송병준의 후손 등 일부 친일반민족자의 후손이 이를 내놓을 수 없다고 소송을 걸어왔다. 이러한 행정소송은 현재도 36건이 진행중이다. 친일파 민영휘의 자손들은 헌법소원을 내 현재 진행중이다.
그러나 이들이 제기한 소송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 걸려 줄줄이 패소하고 있다. 법원이‘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힌 헌법 전문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와는 무관하게 문자로서만 존재했던 헌법이 해방 이후 드디어 제구실을 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패망이 현실로 다가오자‘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했다. 해방된 조국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면서‘건국’편 5조2항에‘적에게 부역한 자들의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한다’고 규정했다. 즉, 나라팔아 부를 축적한 친일파의 재산은 모두 국고로 하겠다는 조치다.
▲ 충칭시기 임시정부가 제정한 건국강령. 독립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건국강령은 임시정부가 피난을 끝내고 충칭(重慶)에 정착했을 당시 만들어졌는데 총강을 통해 건국정신을 역사적 전통의 삼균에서 찾았다. 그리고 토지국유화, 순국선열의 유지, 3·1운동과 임정수립의 관계,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민주·균치를 포괄적으로 설명해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삼균제도가 건국이념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온 국민의 단결을 호소했다.
2장 복국에서는 3기로 나눠 1기는 독립을 선포하고 법규를 반포해 적과 혈전을 벌이고, 2기는 국토를 회복하고 당·정·군이 국내 환국하고, 3기는 국토, 인민, 교육, 문화 등을 완전히 되찾고 각국 정부와 협력의 과정과 실행을 위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어 3장 건국의 단계 역시 3기로 나눠 토지와 주요산업의 국유화, 무상 의무교육 실시 등 삼균제도를 실시하는 과정을 구체화 함으로써 민주공화국의 정체를 분명히 했다. 북유럽식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자 했다.
당시 중국지역 민족운동전선에서는 좌ㆍ우익 정당 및 단체를 막론하고 사회ㆍ경제정책에서는 대부분 사회주의적 요소를 채택하고 있었다. 식민지배 아래 국내 조건을 바탕으로 민족운동전선 자체의 변화, 발전의 결과다.
1930년대 초 경제공황은 농민경제를 파탄시켰고, 근대기업은 일본제국주의의 독점자본에 의해 그 자연적인 발전을 제지당했다. 이 같은 식민지배 아래 경제적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민족경제를 회복시키는 길은 식민지배를 청산함으로써 가능했다. 즉, 경제정책을 비자본주의적 방향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삼균주의는 민족ㆍ공산 양 진영의 대립된 독립운동 노선을 수용하면서 이를 대신해 민족연합전선을 추구할 수 있는 민족독립운동 이념이 됐다. 임시정부는 미국식과 소련식 정책을 동시에 견제하면서 독자적인 대한민국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는 1948년 제헌헌법을 통해 오늘날로 이어졌다.
임시정부 건국강령은 세계화에 분해되지 않고 민족의 길을 만들어 통일의 지표를 세우는 미래의 자산이다.
▲건국강령은 인민주권과 평등주의
임시정부의 최종 목표는 일제에 강탈된 국토와 주권을 회복해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독립이었다. 이러한 독립국가의 대강을 임시헌장을 통해 밝혔는데 이것이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다. 일본의 패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민족국가건설을 위한 새롭고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했다. 건국강령은 이같은 요구의 반영이었다.
건국강령의 정신에는 인민주권제와 평등주의가 있었다.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독재를 철저히 배격하고 다수국민의 행복을 추구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한 기회와 공평한 보장을 제시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모든 구성원의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제에 협조한 친일파에 대한 철저한 처벌과 독립운동자에 대한 우대를 강조했다.
정치적으로는 보통선거를 실시해 모든 국민의 참정권을 인정하고 국민의 기본권리와 자유, 의무를 헌법에 명시토록 했다. 중앙정부의 집중 및 독재방지를 위해 지방자치제의 도입도 의무화 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 및 대생산기관의 국유화를 원칙으로 했다. 일제 및 친일파의 모든 재산은 몰수해 토지는 자력자경민에게 나눠주고, 중소기업을 사기업화 시키도록 했다. 이는 사유재산제에 기반한 자유주의를 부정하지 않고 과도한 불평등과 불로소득을 건국초부터 규제한 것이다. 적산불하를 통해 친일파가 경제적 기득권세력으로 재 등장하고 재벌과 투기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다시 고민하고 꼽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교육에서는 국비의무교육제도를 기본 원칙으로, 초등과 12세 이상 중등교육까지 일체비용을 국가가 부담토록 했다. 교육에 대한 정책과 시설도 모두 국유화를 원칙으로 했다. 배울 기회를 잃은 고령자를 위한 교육도 실시코록 했다.
사회정책에서도 자유와 복지, 남녀평등을 특징으로 신체나 표현의 자유에 비해 소유권에 대해서는 엄격히 규제했다. 특히 사회정책 가운데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점은 당시로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세계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은 미국 1920년, 영국 1928년, 프랑스 1946년에 시행됐다. 더욱이 한국은 유교의 혹독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참정권은 혁명적 조치라 할 수있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서는 노동권과 함께 휴식권을 제시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아직도 한국이 최장노동시간을 기록하는 점에서 휴식권에 대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주목해야 할 사회정책 가운데 하나다. 이밖에도 무상치료, 파업의 자유, 8시간 노동제, 여공의 야간노동 금지 등 진보적 정책을 담고 있었다.
이런 건국강령은 독립운동의 방략인 동시에 해방정국에서 미국과 소련식 정치 이념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남과 북이 美ㆍ蘇의 점령과 지배로 이어지면서 임시정부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김구는 1949년 국민에게 발표한 신년사를 통해“쏘련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아도 독점자본주의가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상품시장한다”며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희망했다. /충칭=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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