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가 국내에 정진대를 파견했다. 1945년 8월10일 시안(西安)에서 일제의 항복소식을 들은 김구는 제2지대 본부가 있는 두취(杜曲)에서 지청천 총사령과 진로를 협의한 끝에“OSS훈련을 받은 광복군 2지대원을 정진대로 편성해 신속히 국내로 진입시킬 것”을 결정했다.
정진대는 미군의 협조를 얻어 일본군을 무장해장시키고, 치안을 유지해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로 일제의 투항을 접수하기 위한‘투항접수예비대’였다. 이같은 계획은 미 OSS에 통보돼 공동작전으로 실행됐다.
당시 광복군은 국내진격작전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일제 패망 후 발언권을 제대로 주장하기 어려울 것은 자명했다. 임시정부는 절박했다. 민족의 운명이 또 한번 외세의 손에 의해 흔들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정진대가 처음 국내로 향한 것은 일제가 항복한 다음날인 8월16일 이었다. 이범석 제2지대장과 김준엽, 장준하, 노태서 등 4명의 광복군과 미군 18명(1명은 한국인 정운수) 등 22명의 합동정진대는 이날 새벽 4시30분 시안을 출발했다. 일행은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는 일본 단위부대를 피하느라 잠시 일정을 늦춰 18일 낮 12시에야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들을 맞은 일본군은‘항복서명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중무장한 일본군의 위력시위로 군사충돌을 우려한 미군은 정진대를 19일 귀환시켰다.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광복군이 받아낼 마지막 기회가 물거품이 됐다. 한국의 운명은 미ㆍ소 강대국의 이해와 요구에 따라 분단국이 되고, 민족상잔의 비극을 격게된다.
또 다른 활동은 중국내 한인청년으로‘확군’을 추진했다. 확군은 이미 광복군의 세력확대 방법이기도 했지만 일제 항복을 계기로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모두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조치였다. 중국에는 1944년부터‘학병’등의 형태로 2만8000여명의 한인청년들이 일본군에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들을 광복군으로 편입해 중국내 한인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무사히 귀국시키고 국군으로 향후 건국군의 토대를 마련키로 하고 중국정부의 동의를 받아냈다. 광복군은 김학규 제3지대장을 총사령으로 한커우(漢口), 난징(南京), 항저우(杭州), 상하이(上海), 베이핑(北平), 광둥(廣東), 국내 등에 7개 잠입편대를 구성했다.
중국이 국내에 지나치게 많은 외국군대의 무장을 허용한 것에 부담을 느낄때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견제는 확군활동은 지지부진해진다. 광복군은 1946년 5월 복원선언으로 해산하고 아쉽게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수행할 임무와 역할이 있었다. 그것은‘파괴’와‘건설’이었다. 파괴대상은 일제의 침략기구이고 민족내부의 봉건세력과 친일세력이었다. 전자가 일제를 상대로 한‘민족혁명’이라면 후자는 민족내부를 상대로 한‘사회혁명’이었다. 광복군은 혁명군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광복군의 또 다른 임무는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이다. 임시정부는 삼균주의를 기초로 1941년 11월 임시정부 건국강령으로 공포했다. 광복군 대원은 선서를 통해 이를 절실히 수행할 것을 맹세하고‘건국군’이 됐다.
광복군은 5년8개월 동안 중국에서 혁명군과 건국군으로 임무와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광복군의 활동은 한국의 자주적 독립의지를 구현한 것이었고, 광복군은 민족사의 명맥을 이어갈 자주독립군이었다. /시안, 충칭=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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