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밀양에서 1898년 출생한 김원봉은 죽마고우 2명과 1918년 난징(南京)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한다. 그들은 조국의 산과 물, 별에 독립운동을 맹세하는데 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如星)으로 호를 정한다.
1938년 10월 우한(武漢)에서는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이는 광복군보다도 빠른 것이다. 1939년에는 김구와 공동으로 좌우합작 성명을 발표하고 1942년 광복군에 참여, 제1지대 및 부사령이 됐다. 임시정부 군정부장으로 환국한다.
이처럼 화려한 독립운동 이력에도 그를 둘러싼 평가는 극단적이었다. 월북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의 행적이 단순한 공산주의자로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기에 보다는 민족해방의 입장에서 이념을 선택한 지성적 고민으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
실례로 김원봉은 1927년 중국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와 함께 남창봉기에 참여했지만 국민당과 살육전에 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이 드러나자 광저우봉기는 참여하지 않는다. 조선혁명간부학교는 그의 황포군관학교 동기 등걸(騰傑)을 통해 지원 받았는데 그는 삼민주의역행사라는 공산당토벌기관의 핵심 책임자였다.
1930년 코민테른의 1국1당(一國一黨) 원칙을 무시하고 독자적 정치학교 레닌학교를 운영한다. 중국 1차국공합작이 깨져 서로 싸울때도 그는 통일전선을 표방했고 1932년에는 상하이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대립했지만 합작을 포기한적은 없었다.
때문에 임시정부의 대표적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는“김원봉의 사상은 사회주의적 경향이 있었으나 민족주의자로 일관한 사람으로 나는 알고 있다”고 회고록‘장강일기’를 통해 밝히고 있다.
김원봉의 월북이유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한 남한사회에 큰 실망을 느꼈던 것은 사실인듯 하다. 더욱이 그는 여운형 암살사건 이후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었다.
환국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담한 그는 경찰에 체포돼 친일경찰 출신으로 악명 높은 노덕술에게 조롱과 함께 공개적으로 뺨을 얻어맞고, 고문을 당했다. 일생 광복에 헌신한 그가 해방조국에서 그런 모욕을 당했으니 그 충격과 울분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는 경찰에서 풀려 나왔지만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3일간 술을 마시며 울었다고 한다. 이것이 원인인지는 몰라도 1948년 남북협상을 위해 월북했다가 그대로 주저 앉았다.
북한에서 그는 최고인민회의 제1, 2기 대의원과 1952년 노동상, 1956년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 중앙위원,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옌안파와 함께 숙청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이력 때문에 6.25전쟁 당시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도보연맹으로 살해되는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고 한다.
한국 근ㆍ현대사에 이념의 대립은 이땅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회한의 뿌리를 내렸다. 이것은 휴전선만이 아니라 정신마저 두 동강 내버려졌다. 때론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살아오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사상의 중심에는 민족주의가 있었다. /충칭, 난징, 광저우=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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