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조용한 시골 마을에 여고생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보란 듯 옥상에 시체를 걸어놓고 달아났다. 누가 어떻게 왜 죽였는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사건은 그러나 손쉽게 종결된다. 현장에서 발견된 도준의 물건을 근거로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엄마는 울부짖는다. “내 아들은 죽이지 않았어요. 뭔가 잘못된 거예요.” 엄마는 범인을 찾겠노라 나선다.
‘마더’는 단 한 줄, ‘아들의 살인누명을 벗기려는 어머니의 사투’로 요약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영화가 그렇게 단순한 영화라곤 생각지 않을 거다. 봉준호가 누군가. 충무로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걸출한 이야기꾼 아닌가. 그런 그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말하는 상투적인 모성 찬가를 만들었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봉준호 감독은 ‘모성과 광기의 이중주’라는 말로 줄거리를 덧붙였다. 오롯이 영화를 이끈 김혜자는 영화 속 엄마를 “짐승 같다”고 표현했다. 도대체 ‘마더’는 어떤 어머니의 이야기인가. 궁금하다.
-‘마더’를 읽는 네 가지 코드
펼쳐진 갈대밭. 한 중년의 여인이 화면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화면의 중앙에 서자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처음에는 그냥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춤이고, 춤이라고 생각하기엔 그냥 몸을 우스꽝스럽게 놀리는 것 같다. 넋 나간 표정과 몸짓에 소름이 좌악 돋는다.
춤은 이 여자가 미친 여자일수도, 미쳐갈 수도 있다는 암시다. 음악이 절정에 이를 때 여자는 눈을 가린다. 제목이 뜰 때 왼손을 옷 속에 감춘다. 그렇다. 이 여자 뭔가 감추는 게 있다.
▶혜자 혹은 김혜자=오프닝 춤 신은 ‘마더’가 왜 한 명의 배우로부터 시작된 작품인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주인공 이름이 혜자인 것도 이 영화가 온전히 김혜자의 거라는 각인이다.
귀기 서린 김혜자의 연기는 따스한 모정과 폭발하는 히스테리에서 눈 둘 곳 찾지 못하는 황망함까지 극단으로 오가면서 관객을 사로잡는다.
‘마더’의 스크린은 김혜자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표정으로 꽉 찬다. 얼굴 표정이 펼치는 버라이어티 ‘액션’, 스펙터클이다. 얼굴 근육의 꿈틀거림은 주름 한 겹 한 겹에 드라마를 쌓아올린다. 그녀는 나이 70을 눈앞에 두고 우리 생애에 드문 경험을 제공한다.
봉준호 감독이 김혜자를 선택한 이유. ‘국민 엄마’를 등장시켜 모성 뒤에 숨은 광기를 극단적으로 드러내려 한 걸 거다.
‘어머니’란 말에서 윤리성이 느껴진다면 ‘어미’라는 단어엔 본능이 실려 있다. 영화 속 엄마가 자식을 지키려는 본능을 좇는 사람이라면 ‘어미’라고 해도 족했을 거다. 그런데 왜 ‘어머니’도 아니고 ‘엄마’도, ‘어미’도 아닌 하필 ‘마더’일까.
엄마의 사랑은 ‘사랑’이란 단어를 갖다 붙일 수 있는 감정의 형태 중 가장 깊고, 징하고, 독하고, 세지 않던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을 사랑. 영화에 등장하는 엄마는 그것마저도 넘어선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자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엄마. ‘마더’라는 제목엔 ‘머더(murder. 살인자)’가 포함돼 있는 거다.
▶아무도 믿지 마=아들 도준의 친구, 진태는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가 직접 잡아. 범인을. 다 필요 없고, 아무도 믿지 마.”
진태의 말은 ‘마더’를 보는 관객에게도 해당된다.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엄마는 빗속에서 전쟁한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용의자들을 추적해 나간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 들리는 것조차 믿어선 안 된다. 영화는 막바지에 도달해선 도리어 무엇을 믿을 거냐, 그 믿음을 어떻게 지킬 거냐, 하고 묻는다.
신비하고 숭고한 ‘절대 선(善)’으로 여겨지는 모성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부터가 관객이 갖고 있는 평범한 생각조차 믿지 말라는 거 아닌가.
감독도 믿지 말라. 봉준호는 ‘마더’가 “가장 뜨겁고 치열한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맞다. ‘마더’는 ‘뜨겁고 독한’ 영화다.
정서는 뜨겁지만 감독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서늘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봉준호는 할 걸음 더 나아갔다. /안순택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