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1926년 광저우(廣州)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수학한다. 이어 1932년 상하이(上海)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해 통일전선을 표방하고 난징(南京)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한다. 의열단은 1935년 한국독립당(상하이),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만주),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과 연대해 민족혁명당으로 발전돼 16년만에 발전적으로 해체한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에는 본부를 충칭(重慶)으로 이동하면서 대원 대부분이 낙양에 집결해 1941년 맹진나루에서 황하를 건너 허베이(河北)성 태항산으로 북상해 허베이(河北)지대를 결성했다. 만주는 물론 본토와 가까워지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해 12월 호가장전투와 형대전투를 치르면서 피해를 입고 팔로군 영향권인 태항산중의 산서상지역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대 본부가 1942년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자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해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이로써 충칭과는 연결이 끊어졌다. 1943년 6월에는 황토산악을 넘어 안전지대인 옌안으로 이동했다.
의열단에서 시작된 조선의용군은 일제 패망 후 남에서‘공산주의자’로, 북에서‘종파분자’로 몰려 대부분 숙청되고 만다. 지금도 우리사회 일부에서는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성과자체를 폄하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어떤 독립운동단체보다 치열하게 일제에 항거했고, 수많은 희생을 치렀던 그들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반쪽짜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 파호문(把虎門) 중국인 반씨의 집에 모인 청년 독립지사들은 밤새 격론 끝에 김원봉을 대표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한다.‘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에서 따온 단체명에서 보여주듯 급진적 민족주의노선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당시 상당수 독립운동단체가 전개한 외교론 등 온건한 독립운동을 비판하고, 작탄투쟁을 전개한다.
의열단은 해체되는 1935년까지 3차례 정도 조직성격을 전환한다. 전반기 1925년까지 일제에 대한 무차별적 테러활동으로 급진 민족주의 또는 무정부주의 이념에 기울었다. 부산경찰서(박재혁), 밀양경찰서(최수봉), 조선총독부(김익상), 종로경찰서(김상옥), 일본왕궁(김지섭), 동양척식회사(나석주) 등 9차례나 연이은 폭탄의거가 그것이다. 조선총독, 군부수뇌, 대만총독, 매국적, 친일파거두, 밀정, 반민족 토호 등을 처단해야 할 칠가살(七可殺)로 삼았다.
하지만, 1926년에는 당대를 풍미한 사상계의 영향으로 이들은 사회주의 이론을 수용한다. 이때 의열단은 조직적 무장투쟁을 위해 황포군관학교에 집단적으로 입교한다데 무려 20명이 함께 들어간다. 지금도 황포군관학교 기념관 내 전시장에는 졸업생 명단이 공개돼 있는데 한국(조선)국적의 이들을 확인 할 수있다. 한국인의 수는 73명에 달한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시내 방면의 샤허(沙河)병영은 한인 청년들의 정규과정 이전에 예비과정을 거쳐 기초 군사지식을 받거나 경비와 실전에 동원됐는데 현재는 광저우경비사령부로 사용돼 일반인은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 황포군관학교는 또 다른 비극이 있는데 이곳을 수학하거나 졸업한 많은 애국청년들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혁명과정에서 희생됐다는 점이다. 당시 이들은 중국혁명을 참가하는 것을 훗날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장기적 투쟁의 일환으로 간주됐다. 광저우 봉기에서는 무려 200여명의 한국인 청년과 의열단이 희생됐다.
후반기인 1932년부터 해체까지 민족통일전선을 표방한 의열단은 다시 국내활동을 강화했다. 1934∼1936년 국내에서 체포돼 주요언론에 보도된 단원만 30명여에 이를 정도다.
의열단은 특히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1932년 7월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열단간부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는 1기부터 3기까지 125명의 청년투사를 양성했고, 3기생의 훈련장소였던 난징 외각 텐닝스(天寧寺)에는 현재 정문의 주춧돌과 우물, 화장실 등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당시로는 임시정부보다 중국의 지원이 컸던 것 같다.
당시 중국정세는 만주와 상해사변이 터지면서 독립운동노선은 새로운 활로가 필요했다. 난징의 독립운동가들도 정치적 성향을 떠나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했고,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의열단은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고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킨다.
▲또 하나의 민족군대 조선의용대(군)
난징의 진룽(金陵)대학은 현 난징대학의 옛 이름이다. 이곳에서 의열단은 조선의용대의 모체인 민족혁명당을 결성한다. 국공합작을 계기로 민족혁명당은 좌파를 연합한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을 결성하고 1938년 10월 우한(武漢)에서 100여명의 대원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로써 우리 민족으로 구성된 독자적 부대로는 처음으로 중·일전쟁에 참전한다.
조선의용대 구이린 본영은 1958년 공산혁명을 기념해 현재 칠성공원으로 변했다. 칠성공원은 산 봉우리 7개가 마치 북두칠성처럼 늘어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대원들의 훈련장은 잔디광장으로 바뀌었고 막사도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청진사만 홀로 남아 관광객을 맞아주고 있었다.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동지ㆍ동포에게 보낸는 공개통신’을 통해 좌우 7당 합당을 논의했지만 안타깝게 좌절된다. 일부에서 조직을 해체하고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을 격렬히 반대했다. 단체별 연대만 지지했는데 최창익 등 일부는 아예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예안으로 이동해 통일논의를 어렵게 했다.
1940년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조선의용대는 주보촌 예가원자마을에, 민족혁명당은 인근 손가화원 대불단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인사통계표상 부녀복무단과 삼일소년단 46명을 포함해 총인원은 314명이었다. 이중 100여명이 1941년 3월 뤄양(洛陽)에 집결해 맹진나루를 통해 황허(黃河)를 건넜다. 이곳에는 이후 황허대교가 놓여지면서 맹진나루터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지만 본보 취재진이 지역주민의 증언을 바탕으로 나루터를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들은 1,2,3대로 나눠 쓰좌장(石家莊)을 중심으로 일본 점령지대에 배치됐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했다. 이때까지 조선의용대는 팔로군 지역 대신 태항산 동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2구 대원 29명이 호가장 전투에서 4명이 사살됐고 김학철은 포로로 잡힌다. 3대가 활동하던 형대에서도 4명이 일본군과 전투에서 사망하는 등 8명의 전사자를 냈다. 타격을 입은 이들은 팔로군 129사단의 주둔지로 철수 할 수 밖에 없었는데, 1942년 5월 편성전투에서는 지휘계통인 윤세주, 진광화가 전사하는 등 타격이 심각해졌다. 이때까지 조선의용대는 민족대오라는 점을 강조하며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대원의 상당수가 화북지역을 떠나자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의 힘은 급속도로 약화됐다. 그와 남은 조선의용대원은 1942년 광복군 1지대로 편입됐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이 됨으로써 중국 관내지역의 무장독립운동세력간 통합이 이뤄진다.
충칭의 본대가 광복군이 되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독립체계를 갖추고 정당으로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당시 상황은 팔로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은 1943년 안전지대인 옌안으로 이동된다.
조선의용군은 태항산에서 험준한 황토산악을 넘어 옌안에 도착해 나가평에 정착했는데 28개의 굴집을 만들어 대오를 정비한다. 조선이용군은 각지로 보낸 전지공작대의 활약으로 일제패망 당시 가족을 포함 500명으로 확대되며 해방 후 대부분 북한으로 들어가 속칭‘연안파’를 형성했지만 남북전쟁이 이후‘종파분자’라느 오명을 쓰고 숙청된다. /난징,광저우,한단,뤄양,옌안=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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