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운하 소설가 |
그즈음 당나라가 몰락하기 시작했고, 그의 고국 신라 역시 급속한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통일신라는 분열되고, 후백제가 일어나고,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그 모든 서글픈 시대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던 최치원은 그저 멀리서 백성들의 고난에 한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세상에 대한 근심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없었던 그는 홀로 세상 이곳저곳을 방랑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그가 “산림과 강과 바다를 소요방랑하며 정자를 짓고 송죽을 심으며 책으로 베개를 삼고 풍월을 읊었다.” 고 전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세상을 떠돌던 시기에 쓴 최치원의 시를 보면 울분과 통한을 곱씹으면서 외로운 구름처럼 쓸쓸하게 방랑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어느 시기에, 영원히 산 속으로 은둔해버렸고 그의 최후 은둔지가 가야산인지, 지리산인지, 충청도 홍성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이른 아침 일찍 집을 나선 후 갓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짚신은 벗어놓은 채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만 전설처럼 전해질 뿐.
내가 문득 최치원을 떠올리게 된 것은 두 역사적 인물 사이에서 어떤 징후적 유사성과 반복을 떠올렸던 것이다. 두 인물 모두 공동체에서 이방인과도 같은 위치에서 출발했고, 개혁을 추진하려 했지만 완강한 기득권층의 반발에 부딪쳐 좌절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정치적 반대자일지언정 공동체를 위해 기여하고 헌신할 정치적 배려와 기회를 용납하지 않는 정치문화를 가진 공동체라면, 그런 유연성을 잃어버린 정치체계는 위험하다. 이미 구한말의 우리 역사에서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의 공과는 훗날 역사가 공정하게 판단할 것이다. 다만 나는 국가 원로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우리의 정치문화가 이토록 잔혹해야할 까닭이 있는지 안타깝고 서글플 뿐이다. 또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가 더 유연해지고 개방적으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경직되고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하는 징후가 아닌가 두려운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나쁜 역사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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