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是同本... 고국향한 그리움 절절히 묻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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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요산책> 3. 조선도공의 후예들

  • 승인 2009-11-26 10:07
  • 신문게재 2009-05-19 9면
  • 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안영진 중도일보 前 주필
대화 도중 沈씨는 등 뒤 장지문을 열더니 먼지 낀 책자 한권을 꺼내왔다. 세월의 때가 절은 것으로 표지엔 ‘교린수칙(交隣須則)’이라 적혀있다. 교린이란 ‘이웃과 사귀는 일’이며 수칙은 ‘그 지침서’라는 뜻이다. 표지를 넘기더니 沈씨는 읽어 내려간다.

원문은 한자인데 그 옆에 일본 ‘가나’로 토를 달아놓은 게 눈에 띈다. 머리말 한 구절만 인용해보자. 양반(兩班)이란 의관을 바르게 함으로써 (ヤンバントハ カンムリオ タタシクシデコソ)라는 식으로…. 어설픈 직역 솜씨지만 듣다 보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沈씨는 목이 메인듯 필자의 손을 꼬옥 잡는다. 명치유신 때까지 이곳 조선도공들은 혈통과 언어보존, 조선예절 지키기에 진력해왔다는 것이다. 沈씨 문중에는 <수관>과 같은 세계적인 도예가가 있고 朴씨 문중에선 ‘도오고시게노리(東鄕)’ 같은 인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시게노리는 도쿄제대 독문과를 나온 수재로 고등문관을 거쳐 외상(外相)을 두 번씩이나 지낸 외교계 거목이라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종료 후 맥아더사령부가 설치한 극동군재(極東軍裁)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으나 결과는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는 도쿄 ‘스가모(巢鴨)’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악명 높은 이 형무소는 ‘이게부꾸로(池袋)’에 있었는데 지금은 60층짜리 ‘션샤인호텔’이 들어서 있다. 그 호텔 후원 돌비(石碑)엔 ‘평화가 영원하길(平和ガ 永久になるよう….)’이라 새겨놓았다. ‘시게노리’는 아까운 인물이며 도공들의 표상이었다고 沈씨는 말한다.

‘미노야마(美の山)에는 도공후예 60여 호가 살고 있으며 가마(도요)를 지닌 가구는 6호 정도…. 이 마을 놀이터엔 세워 놓은 게시판에 <노력하자! 선두를 달리자! 도오고(東鄕)선배를 따르자!>라고 적혀있다.

도공 朴씨 문중에는 또 한 사람의 ‘도오고(東鄕平八郞)’가 있었다. 일 · 러 전쟁 때 우리의 독도 부근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전멸시킨 일본의 해군 총사령관…. 그 역시 박씨 혈통이라니 놀랍다. 도오고는 발틱함대가 현해탄을 거칠 것인가. 아니면 ‘사할린’과 북해도 사이 ‘소오야(倧谷)해협’을 경유 ‘블라디보스톡’항으로 갈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다.

이때 ‘도오고’ 사령관은 현해탄통과를 확신하고 있었다. 저 멀리 유럽 흑해에서 떠난 러시아함대는 두 달이 가까워오니 지쳤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를 택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러시아 함대가 다가오자 ‘도오고’가 내린 명령은 오늘에까지 전해오는 명구다.

<황국(皇國)의 흥망. 이 싸움에 달려 있다. 각자는 일층 분발 노력하라!>라고…. ‘도오고’에겐 또 한 가지 일화가 따라다닌다. 군신(軍神)이라 떠받들며 어느 강연장에 초청받은 그는 주위의 칭송에 이렇게 말했다. <분로쿠 게이죠(임진란) 때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자신은 큰 인물이 못 된다.>고 말이다.

▲ 안형과는 원래 한 뿌리
-안 = 도쿄에서 발간하는 문예춘추를 읽고 있습니다만 그 책에서 선생의 글을 대했습니다. <조상에 도전한다>라는 글을….

-심 = 아, 그것을 읽으셨군요. 이밖에도 일본의 도자기 ‘사츠마’편(日本のやきなの, 薩摩篇)이 그것입니다. 그는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듯 컬러판 저서를 내보인다. <졸작(拙作)입니다만…. >하더니 표지를 넘기고 나서 짐짓 망설이는 눈치다. 냉큼 붓을 들어 먹물을 쿡 찍더니 다음과 같이 써내려간다. 첫 장에 쓴 것은 분명 시(詩) 구절이다.

<太白の霜か 秋の 靑松里>
(태백에 찬 이슬인가. 가을의 청송리)
安榮眞 仁兄 惠存
(안영진 인형혜존)
本是同本
(형과 나는 본래 같은 뿌리입니다.)
戊午 十月 吉日
(무오 10월 길일)
14代 沈壽官
(14대 심수관)

속필이다. 그는 힘줘 낙관을 찍더니 필자에게 기념이라며 넘겨준다. 과분한 선물이다. 그의 글귀 가운데 ‘형과는 본시 한 뿌리였습니다’라는 표현이 가슴을 울린다. 그의 저서 <일본의 도자기, 사츠마편> 편에는 ① 풍토와 환경 ② 가지기 마을과 용문사(龍門司)의 가마 ③ 도향(陶鄕) ‘나에시로가와’의 변천 ④ 도기의 마을 ‘히라사 사라야마(平佐血山)’ ⑤ 조선도공 이전의 ‘사츠마’ 도업 ⑥ 도공 도래의 배경 ⑦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⑧ 도공 김해(金海) ⑨ 구시키노요와 그 주변 ⑩ ‘나에시로가와’(苗代川)의 흐름 ⑪ 백문(白紋)과 흑문(黑紋) ⑫ 명품 감상 등의 순으로 기술한 책자다.

도자기에 문외한인 필자는 이런 책자 외 기행을 통해 상식선의 이야기라도 할 수 있게 된 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 도기와 자기는 다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도자기보다 사화(書畵)를 더 선호해온 것으로 짐작된다. 신분을 말할 때 사농공상(士農工商) 순으로 매겨왔듯이 문물을 놓고도 글(文)과 서(書藝), 그림(畵) 도자기(陶磁器) 순으로 따졌다.

그래서 과객(過客)이 선비집에 들면 문사는 사랑채에 안내, 술대접을 했고 화공은 툇마루에 도공은 바깥마당에 방석을 깔고 식은 밥덩이를 안겨주는 정도였다. 중국도 도자기보다 서화 쪽에 더 비중을 둬 온 민족이었다. 하지만 같은 한자문화권인데도 일본 만은 유독 도자기에 무게를 둬온 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실용주의성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도자기의 발상은 중국이었다. 하지만 도기(陶器)와 자기(磁器)는 엄연히 구분된다. ‘도기’는 흙을 이겨 궈내는 것이고 ‘자기’는 돌을 소성(燒成)시켜 제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도기’는 산화알루미늄이 주성분이지만 ‘자기는’ 규산(硅酸), 질, 장석(長石) 계통의 흙으로 이뤄진다.

토기와는 달리 자기는 광택이 빛나고 표면을 두들기면 금속성이 울려 퍼진다. 이와 같은 자기를 생산한 나라는 중국뿐이었다. 중국은 3세기경 질이 좋은 자기를 생산, 세계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것이다. 특히 당대에 꽃피웠던 월주(越州)자기는 비색청자(秘色靑磁)라 불리며 시인, 묵객 등 상류층이 이를 애호했다.

중국 도자기술이 <고려>에 전해지자 고려에선 더욱 화려한 고려자기를 만들어 원류인 중국을 놀라게 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그 기술은 고려에 머물지 않고 조선조에 이르러 ‘조선백자’를 구어 냈다. 그 무렵, 일본에는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같은 도요기술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평범한 밥사발과 찻잔하나 구워내지 못하던 왜국(倭國)에선 조선도자기에 ‘센노리큐(千の利休)’ 보증서만 붙으면 영주(大名)와 거상(巨商)들이 일성(一城)과 천금을 마다 않고 손에 넣으려 달려들었다. 그래서 임진란 때 왜군은 조선도공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갔다. 임진란을 ‘도자기전쟁’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沈씨가문 12대부터 번성
거장, 沈수관은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나온 엘리트로 청년기엔 거물정객의 비서관을 지낸 일도 있다. 또, 전 ‘오부치(小淵惠三)’ 수상과 대학 동문이라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 바람에 한 · 일 정상회담(DJ-오부치) 때 沈씨는 그때 초청을 받기도 했다.

임진란 당시 남원성(南原城)에서 포로로 잡혀간 沈堂吉 14대손 수관씨…. 전라도 출신 대통령을 만난 그 감회란 어떠했을까. <정치에서 손을 뗀 이유가 뭐냐?>고 묻자 가업(家業)을 잇기 위해서라고 했다. 여기서 필자는 정치란 무엇인가? 라고 조금은 천박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머뭇거리다 이런 말을 했다.

<정치란, ‘미리 계산된 사기술’이라 말하는 이가 있고 ‘언어(말)의 향연’이라 이르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우나….>하고 틈을 들리더니 이렇게 토를 달았다. 정치란 묘한 것이 되어 <너무 가까이 가면 화상(火傷)을 입기 쉽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동상에 걸리기 쉽다>고….

정치이야기는 이쯤에서 끊었다. 沈씨와 깊은 인연을 지닌 또 한 사람 ‘시바료타로우(司馬遼太郞)’를 빼놓을 수 없다. ‘시바’는 일본 문단의 거성으로 사츠마 조선도공을 소재로 소설을 쓴 작가다. 그 소설에선 ‘다치바나낭케이’의 ‘서유기’도 실감 있게 다루고 있다. ‘다치바나’가 도공들에게 향수(鄕愁)가 남다르겠다며 위로하자 <고향난망(難望)이외다.>라고 대답했다.

소설제목 <故鄕 亡じカたく候>를 김소운은 <고향을 어찌 잊으리까>라 했지만 필자는 <고향난망이로소이다>를 고집하고 싶다. 沈수관씨 가계는 초대 심당길로부터 14대 수관(壽官 )으로 이어지지만 ‘수관’은 습명(襲名)이다.

12대부터 수관인데 이젠 ‘가스데라(一揮)로 이어진다. 沈씨는 말한다. <나는 14대 수관이고 자식 놈(一輝)은 15대 수관이지요> 여기서 묘한 것은 누대(累代)를 독자로 계승해왔다는 점이다. 13대는 관리였고 가운을 세계에 떨친 건 12대 수관이라 했다. 그는 시로(白) 사츠마와 스카시보리(透彫)를 개발, 한 공로로 명치천황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는 또, 1873년 비엔날레 세계박람회에 <금수목단문화병>을 출품 입선하는 바람에 일본 도자기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70년대 沈수관씨는 유럽여행길에 12대 수관의 목단화병을 2언엔(한화 20억원)에 되찾아왔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있다. 조상의 혼이 깃든 이 화병의 귀환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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