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공동작전은 영국군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동남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한 일본은 1942년 말레이지아와 싱가폴을 점령하고 버마를 침공한다. 해안이 봉쇄된 상태에서 연합국은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버마를 이용했는데 일본의 침략으로 수송로가 차단되자 탈환작전에 광복군의 도움을 요청한다. 광복군은 1943년 한지성 등 9명을 파견해 임팔(Impal)전선에서 일본군의 탈영자를 속출시키는 등 큰 성과를 거둔다.
자신감을 얻은 광복군은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국내진공을 위한 연합작전을 제안한다. OSS역시 대일첩보작전을 위해 ▲납코작전(하와이 한인이용) ▲독수리작전(광복군과 연합) ▲북중국첩보(연안의 조선의용군활용) 등을 검토하던 단계로 광복군의 제안을 수용한다. 그동안 일부에서는 미군의 필요에 의해 광복군이 OSS에 모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광복군의 2차세계대전 참전전략에 따라 주도적으로 미군에 연합작전을 의뢰해 특수부대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1945년 5월 제2지대 31명 등 광복군 50명은 두취를 중심으로 3개월간의 미 특수훈련에 들어간다. 본보 취재진은 이번 특별취재를 통해 미타고사(彌陀古寺) 인근에서 광복군이 훈련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낙하산 훈련장 추정지를 국내 언론사상 처음으로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미군은 광복군의 군내진입을 위해 낙하훈련을 실시했는데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미타고사 인근의 벽돌공장을 산병(중국의 낙하산병 명칭)기지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벽돌공장은 미타고사에서 자동차로 6∼7분 거리로 현재는 일부가 식초공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머지 공간은 사실상 방치상태에 있었다.
주민 미푸하이(78.米富海)씨는“1945년께 미국인등 200여명이 미타고사 서북쪽 우타이(五臺)방면 벽돌공장에서 주둔하면서 외국인 산병을 훈련시켰다”며“훈련병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중국인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인 남오대산 관리인 류바오쉐이(43.柳寶歲)씨 역시“마을 어른들로부터 벽돌공장에서 외국인 산병훈련이 실시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들은 훈련병들이 광복군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 이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김구와 이청천, 이범석이 미국은 도노반소장, 홀리엘대령, 사전트 대위가 참여한 가운데 OSS훈련을 받은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을 논의한다. 이 자리에서 도노반 소장은“오늘 이시간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작전이 시작된다”고 한ㆍ미 공동작전 실행을 선언했다.
푸양에 준둔한 제3지대 역시 쿤밍의 OSS본부와 연계해 미 14항공대가 주둔중인 립황(立煌)기지에 1기 22명을 파견해 훈련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일본이 일찍 패망하는 바람에 이들의 국내진입작전은 실현되질 못한다. 우리로서는 승전국의 지위를 요구할 기회를 잃어버린 셈으로 분단국가를 스스로 막아내지 못했다. 미 마샬육군참모총장도 회고록을 통해“1946년 봄 일본 본토를 공격할 계획이었다”고 밝혀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다.
임시정부는 당초 광복군 3개 사단을 육성해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때문에 중국을 통해 연합국에 대대적인 군가지원을 요청했었다. OSS작전도 실행계획 중 하나다. 국내진공계획은 3단계로 진행될 예정으로 우선 미 잠수함으로 광복군대원의 국내침투, 이어 이들로 하여금 국내거점 마련과 부여된 공작수행, 셋째로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 후방 무장활동 개시였다. 이러한 작전은 연속적으로 추진될 계획이었고 광복군은 이미 제3지대에서 2차 진공대를 훈련중이었다.
임시정부가 기획한 국내진공작전 가운데는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제주도를 근거지로 일본과 한반도의 연결고리를 끊는 작전도 있었다. 즉, 제주도에 미군과 광복군이 공동으로 상륙작전을 벌여 교두보로 삼고 한반도에 진공적전을 벌임으로써 국내봉기를 유도할 계획이었다. 이같은 계획이 비록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우리의 힘으로 조국의 광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시안.푸양=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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