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은 선언문에서‘1919년 임시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편성되었음을 밝히고 편성목적을‘중국 국민과 합작, 두 나라의 공동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밝혔다. 이는 대한제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하고 연합국의 일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독립군은 군대해산령 이후 의병활동을 이어 3.1운동에 이르러서는 50여개의 군단이 조직됐다.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면서 일본에 맞서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북만주와 연해주로 전술적 후퇴를 하는 동안 경신참변(1920년)으로 나라잃은 민족의 설음에, 자유시참변(1921년)은 나라없는 군인으로 울분에 떨어야 했다.
독립군은 흩어진 전열을 재편해 1922년 만주 통의부 및 대한독립군을 결성하고 참의, 정의, 신민부 등 3부로 재정비됐지만 1931년 일제의 만주괴뢰국으로 큰 제약을 받게 된다. 이어 3부 통일운동의 결과로 성립된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으로 1937년 중일전쟁 전후까지 독립전쟁을 이어가다 일부는 중국본토로 이동하고, 일부 사회주의 인사들은 만주에서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벌인다.
중국 본토로 이동한 지청천, 이범석 등은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광복의 그날까지 대일항전을 펼친다.
▲선 지휘부 구성, 후 병사모집
창설 초기 광복군은 병사없이 지휘부만 갖춘 군대였다. 먼저 총사령부를 구축하고 병력모집에 따라 산하 단위부대를 그때그때 편성하는 방식이다. 병사도 없는 군대를 조직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황당한 일이다. 하지만, 광복군은 모병에 자신이 있었기에 이같은 하향식 편제를 채택했다.
당시 임시정부가 편법인 하향식 편제라도 사용해 광복군을 창설한데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다. 중일전쟁이 점차 격화되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국제정세는 연합국과 동맹국으로 나뉜다. 임시정부는 항일 노선을 위해 당연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야만 했다. 그래야 각국의 승인은 물론 전후 세계질서 재편에 동참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같은 희망이 모두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임시정부의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은 비교적 정확하고 현명했다.
결과는 일단 성공적이었다. 중국정부와 외국사절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설마하는 그들에게 우리의 항일의지를 보여줬고 이는 적극적인 군사지원으로 이어졌다.
광복군은 창설 두달만에 30여명의 본부인원 가운데 총사령관 지청천 등 최소인원을 제외하고 총사령부를 시안(西安)으로 옮긴다. 시안은 화북과 가까운 최전선으로, 1년전 이미 군사특파단을 파견해 40여명의 한인병사를 확보하는 등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이 점령한 베이징(北京), 텐진(天津) 등 화북지역에는 20만이, 만주에는 120만의 한인이 이주해 있었다. 광복군은 1,2,3,5,6징모처를 통해 포두에서 상하이까지 중국대륙 전체를 상대로 모병을 벌였다. 광복군의 초모활동은 눈부신 결과를 가져와 창설 1년만에 대원 300명이 늘었고 1945년에는 700명으로 불었다.
시안시내에는 인민법원을 중심으로 광복군 유적이 산재해 있지만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광복군총사령부인 얼푸지아(二付街) 4호는 베이따지아(北大街) 확장공사에 헐려 도로로 변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자리는 인민법원이 들어서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군사특파단주재지도 얼푸제 건너편의 통제방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취재중 정확한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광복군에게는 남모를 고민이 하나 있었다. 창설 1년여인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가 지휘 감독권을 가져간 것이다. 임시정부는 굴욕적이었지만 중국정부의 원조와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더욱이 중국영토에서 한국인 무장부대를 운영해야하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었다. 어쩌면 이로인해 중국은 광복군을 더욱 지원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에 끈질긴 협정개정을 요구했다. 1944년 8월 28일 중국군사위원회는‘한국광복군는 당연히 한국정부에 직속할 것’이는 통보를 해온다. 종전의 한·중 협정을 취소한 것이다. 드디어 광복군은 자주군대의 독자적 지위와 작전지휘권을 찾아온다.
▲광복군으로 군사통일
초기 광복군은 3개 지대로 편제를 구성했다. 임시정부가 1939년 국무회의에서 제정한‘제1기 임무로 장병을 급속 모집, 단기훈련을 실시해 최소 3개사단으로 항일전에 참여한다’는 방침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시안에서 무정부계열의 전지공작대 100여명을 한꺼번에 받아들임에 따라 제5지대를 구성해 4개 지대로 조직을 확대했다.
이어 임시정부는 1942년 조선의용대를 추가로 편입해 1지대로, 종래의 1,2,5지대를 제2지대로, 1945년 제6징모분처를 3지대로 개편한다. 이는 조선의용대의 편입에 따라 개편이 불가피한 부분도 있었지만 광복군 주력이던 5지대에서 어이없이 지대장 나월환 암살사건이 일어남에 따라 대원들의 동요를 막기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광복군 1지대로 편입된 조선의용대의 충칭 탄즈쓰(彈子石) 주둔지는 현재 재개발이 진행되고 고속도로가 개통돼 대부분의 흔적이 사라졌다. 현지인조차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지 못한 가운데 당시 한인들이 거주하던 집 2∼3채가 철거를 앞두고 비워진 상태였다.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은 중국이 개입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 무장세력간의 통합이 여의치 않자 일방적으로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선언했고 받아들여졌다.
제1지대는 군사활동보다는 정치활동에 비중을 두었다. 충칭이라는 후방에 위치한데다 병력이 40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임정에 참여해 정치호라동에 주력한다. 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의 야당 역할을 했다.
개편된 광복군 2지대는 서안시내 광복군 총사령부에 있다가 총사령부가 다시 충칭으로 이전하자 시 외각의 두취(杜曲)로 옮겼다. 광복군 2지대가 머물렀던 곳은 현재 두취진 곡물창고로 당시에는 인근에 중국 호종남부대가 주둔해 지원이 쉽고 화북지역의 초모활동에 유리했다. 1945년4월 총사령부에 보고된 2지대는 관좌(官佐) 28명, 대원 122명, 사병 25명 등 185명에 달해 활발한 대원모집을 보여줬다.
일본군이 점령한 적지에서 초모활동은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는 첩보작전이었지만 2지대는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피살되거나 전투중 전사하는 등 끈임없는 희생속에서도 헌신적인 노력으로 급성장을 이룬다.
광복군 3지대가 주둔한 푸양과 린췐(臨泉)은 안휘성 북서쪽 맨 구석으로 하남성과 경계지점으로 서주대회전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전투과정에서 탈출한 한인병사를 임시정부가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푸양에서는 1945년 6월 30일 광복군 제3지대 성립식이 인민극장에서 거행됐는데 8명에 불과한 징모6분처 대원들은 3년만에 전진에서 대원을 180명으로 늘렸다. 지금 이곳 인민극장은 만하탄 디스코클럽으로 바뀌어 보는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린췐은 푸양에서 60㎞떨어진 곳으로 성 경계에 있는데 중국 제10전구사령부와 예하부대들이 자리잡아 탈출한 한인병사들을 모으기 유리했다. 광복군은 당시 린췐소학교에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을 만들어 군사교육을 실시했는데 지금은 이곳이 제일중학교로 바뀌었지만 현재는 어느곳에도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과 함께 운영과 활동을 뒷바침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결과로 무정부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좌파인 조선의용대를 편입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무장독립세력을 모두 결집했다. 결과적으로 중국 관내지역 무장세력의 군사통일이 이룬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연합군과의 공동 작전을 추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시안.충칭.푸양.린췐.쿤밍=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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