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상공회의소는 당시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할 수 있도록 건의하거나 돈이 부족했던 대전 지역에 충청은행을 직접 만드는데도 이바지했다. 또 대전이 자립도시 기능을 갖추는 데 필요한 지역 산업단지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전지역의 여러 경제여건을 조성하는데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대전의 경제성장 역사와 함께 궤도를 함께한 대전상공회의소의 과거를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 (왼쪽사진)대전상공회의소는 1948년이후충남도산업장려관건물(현 중부경찰서 자리)을 대전시청과 함께 사용했다. (오른쪽사진)1967년 제4회 상공인의 날을 맞아 대전상공회의소 앞에 화환이 가득한 모습. |
▲실익추구 차원 1932년 출범=대전지역에 상공회의소 필요성이 부각된 것은 1930년대 초 경부선 철도를 대전에 건설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대전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교통의 중심에 있는 대전의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고 실익추구 차원에서 상공회의소를 만들게 됐다.
철도부설과 함께 물류를 선점해 부를 쌓은 일본 상인을 비롯해 당시 대전실업협회 회원 182명은 1932년 6월 18일 정동 대전금융조합 2층에서 총회를 열고 조선상공회의소령에 따라 대전상공회의소(이하 대전상의)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날은 대전상의 설립기념일이기도 하다. 1933년 11월 조선총독부의 상공회의소 설립인가를 받고 의원선거를 통해 18명의 의원과 3명의 특별의원을 선출해 정식 운영에 들어갔다. 당시 선거로 선출된 의원 21명 중 일본인이 18명이고 조선인은 3명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광복을 맞이한 후 상공회의소는 일본강점기 전시통제 경제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는 이유로 전쟁 이후 미군 통치시기에는 귀속재산으로 몰려 미군정이 접수하기도 했다.
그 후 6·25전쟁 기간 동안 대전지역 산업시설이 대부분 파괴된 상태에서 대전상의는 다시 한 번 시련을 겪어야 했다.
상공회의소가 한때 일제의 하부 노릇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제의 강권에 의한 것임을 꾸준히 설득하고 각지 상공경제회가 사실상 조선의 전통적인 상공업단체였던 상공회의소의 전신이었음을 설파해 마침내 1946년 12월 원래의 상공회의소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1953년 10월에는 대전상의가 법인 등록을 마치고 이후 법인으로써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당시 대전지역의 대표적인 공장이라면 대전방직을 비롯해 풍한산업, 대영메리야스 등 섬유공장과 부국양조 공장, 대전주정공업주식회사 등 주류업체, 그리고 동아연필주식회사 등이 50명 이상을 고용한 비교적 큰 기업이었다.
다시 5·16 군사쿠데타로 활동이 잠시 중단됐던 대전상의는 1961년 4대 회장을 선출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위한 기지개를 켰다.
1961년 이후에는 대전상의 회원들이 주주로 참여해 기업 금융의 불모지였던 대전·충남지역에 충청은행을 설립하고 투자금융사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또 산업단지 조성에서 발 빠르게 나서는 등 경제 기반을 조성하는 데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 대전상공회의소 구성원들의 각고의 노력끝에 1968년 중동 중앙극장자리에서 충청은행 개장식을 가졌다. |
1967년 은행 설립에 대한 대통령 연두교서가 발표되고 지역에도 은행을 설립할 수 있게 되자 당시 중도산업(중도일보 전신) 이웅렬 사장을 필두로 30여 명의 기업인들이 충청은행 설립에 뜻을 모았다.
이들은 대전은행설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주주 모집에 나서지만, 당시 납입금 1억 5000만 원을 채우는 데는 실패했다.
발기인들이 자금난의 이유로 은행주식 매입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웅렬 중도산업 사장은 대전상의 회장 선거에 직접 나서 제6대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발 빠르게 움직여 자본금을 2억 원에서 1억 5000만 원으로 낮추고 충북지역 상공인들의 투자를 끌어들인다.
결국, 처음부터 참여했던 발기인들에다 대전지역 다른 경제인들, 그리고 충북지역 상공인들이 주주로 참여해 자본금 1억 5000만 원을 모두 납입해 충청은행은 빛을 보게 된다.
1968년 2월 15일 자본납입금을 모두 입금하고 그해 2월 20일 대전상의 회의실에서 역사적인 충청은행 창립총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상공회의소 전 상근부회장 신가현(74) 씨는 “지역에서는 사업이 잘돼도 잠시 돈을 빌릴 곳이 없어 지역은행 설립 취지에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며 “생각만큼 일이 진척되지 않아 이웅렬 사장은 직접 대전상의 회장에 도전하는 등 열성을 가지고 움직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후 대전상의는 대전 3·4 산업단지 조성에도 큰 활약상을 보인다. 당시 14만여 평의 대전1·2산업단지는 지역 수요보다 무척 좁은 상태였다. 이에 대전상의는 신탄진 문평리 일대에 산업단지를 들이고자 충남도와 정부를 수차례 만나 설득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신탄진 일대는 절대농지로 묶여 공단부지로 변경하는데 토지개발이 어려운 상태였다.
▲ 1991년 대전엑스포 상징탑 기공식. 대전상공회의소는 엑스포과학공원 조성에 토지매입 등 시와 함께 준비했다. |
기업인들의 자본에 대한 목마름은 지역을 살찌우는데도 크게 작용했다.
대전상의 상공인들은 자금난 해소를 위해 충청은행에 이어 단기투자금융회사 설립에 나선다. 1977년 당시 대전에서 기업자금을 대출받기 위해서는 대전에 있는 은행에서 결정하지 못하고 모든 서류가 서울을 다녀오는 시스템이었다.
또 대전에서 모인 자본 역시 서울에 집결한 후 다시 지역으로 내려오는 방식이어서 지역 기업인들에게는 불편한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이에 대전상의는 회원 기업인과 힘을 모아 전문적으로 기업을 담당하는 투자금융회사를 설립에 나서게 된다. 1979년 제9회 송덕영 회장은 대전투자금융주식회사 설립 위원회를 구성하고 특정 재벌그룹이나 소수인에 독점되는 일이 없고 순수한 지방 상공인들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당시 재무부의 요청에 따라 드디어 1979년 대전에 두 번째 금융회사를 세우게 된다.
1979년 12월 8일 중구 대흥동에 마련된 본사 건물에서 성대한 개점식과 함께 대전지역의 상공인에게 금융투자를 맞게 될 금융회사를 설립한다.
이것은 후에 인수합병으로 상호는 바뀌었지만, 지금까지 지역 금융회사로 남아있다. 이렇게 대전의 금융회사인 충청은행과 대전투자금융 그리고 대전생명보험이 대전상의의 노력 끝에 결실을 보게 된다.
이후 대전상의는 기업인들의 애로사항을 접수해 정부에 건의하는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 1996년에는 수도권 첨단업종 대기업 공장신설 허용방침 철회와 정부시설공사에 지역업체 공동도급 참여 등 지역 기업이 원하는 정책을 정부에 직접 전달했다고 시정백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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