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安 = 선생댁은 마치 보물(도자기)창고라는 인상입니다.
△ 沈 = 손님들이 자주 그런 말들을 하죠.
▲ 安 = 400년간 창씨(創氏)를 않고 어떻게 견뎌냈는지 궁금합니다. 저쪽 아리타(有田)에선 납치 당시 가키우에몽(右衛門)이라 개명을 한 걸로 압니다. 같은 여건이었을텐데?
△ 沈 = 이참평씨에 관해선 되도록 말을 삼가 하려합니다. 어떻든 저의 조상님들의 긍지는 대단하셨죠. 아니 사츠마요(窯) 도공전체가 그러했습니다. 심씨, 박씨, 정씨 신씨 등 40여 도공들은 혈통보존에 힘써오셨지요. 그러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맞아 모두 창씨개명을 했는데도 저의 가문만은 그것을 거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 安 = 그때 단군전(檀君殿)이 교쿠상구우(王山宮)로 개명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沈 = 거기까지 알고 계시군요.
▲ 安 = 서울에 오신 적이 있으시죠?
△ 沈 = 두 번 다녀왔습니다.
▲ 安 = 박정희 대통령도 만나셨다구요?
△ 沈 = 지금도 그 분 인상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정문에서 <어서 오게나!>맞아주시며 저를 덥석 끌어 안으셨어요. 체온이 제 가슴에 닿는 순간 친형님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安 = 청와대에서 정담이 오고 간 걸로 압니다만?
△ 沈 = 대통령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내가 도와줄테니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 安 = 그래서요?
△ 沈 = 각하의 뜻은 고맙지만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다고 아픈 역사(임진란)가 치유되는 것도 아니고 현재 자신은 일본에서 도조(陶祖)행세를 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한국도 이젠 <한강의 기적>을 이뤄 잘 살고 있는 만큼 4대양 5대주로 진출해야 할 판이니 귀소(歸巢)란 의미가 없는 것 아니냐고….
▲ 세계적인 도공 심수관씨<오른쪽>와 필자와의 인터뷰 모습 |
이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체통 없이 일본 군가를 부르다니. 18번이라는 <황성옛터>도 있지 않은가 하고. 이 대목은 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얼마 전 필자는 등산길에서 우연히 이 말을 했다가 낯선 등산객과 말다툼을 벌였다.
그 사람은 그럴 리 없다며 필자에게 대어들었다. 민족의 지도자를 폄하한다면서…. 필자도 반격에 나섰다. 그런 식으로 받드는 건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리의 비약이라 받아쳤다.
박대통령의 치적, 청렴성, 가난을 이겨낸 철학 같은 걸 내세워야지 있는 사실(작은 일)을 은폐, 과대 포장하는 건 옳지 않다고 말이다. <여수 순천반란>을 진압한 게 박대통령이라고 까지 나왔다. 그는 필자를 향해 청와대에 앉아 박대통령이 <보리와 군대>를 불렀다는 증거를 대라며 책임을 져야한다고 언성을 높인다.
70중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다. 그의 말투로 보아 애국단체에 적을 둔 인물인 듯했다. 그 증거를 가져올 테니 내일 이 자리에서 만나자고 필자도 맞섰다. 기행문(심씨의 말)과 시바료타로의 글을 증거로 내세울 생각에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튿날 그 장소엘 가보니 상대는 보이질 않았다.
▲ 沈씨의 서울대 강연
沈씨는 서울대에서 강연을 했다며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임진란 때 끌려간 도공들의 수난과 사츠마 도요이야기를…. 강연이 끝나자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일제 36년, 피압박 사례를 열거하며 일본을 성토하고 나섰다.
이때 沈씨는 마이크를 다시 잡고 <36년간의 피압박 참상을 나는 압니다. 하지만, 우리 도공들은 36년 아니 360년간 14대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고…. 이 말에 장내는 물을 뿌린 듯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이때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학생들이 합창을 하는 것이었다. 영재들은 분위기를 바꾸는데 남다른 솜씨가 있구나하고 감탄했다는 심씨.
노란 셔츠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맘에 들어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어쩐지 맘에 들어
가사내용은 잘 모르나 한 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노래다. 어째서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 영문을 몰랐지만 沈씨 자신이 노란 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필자는 말을 바꿔 沈씨를 향해 물었다. 벽에 걸린 망건(網巾)을 가리키며….
누구 것이냐고 묻자 200년은 되었을 것이라며 몇 대조 할아버지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신주단지>처럼 소중한 가보라고 했다. 말총으로 짠 망건…. 머리때가 쪼르르 흐를 것만 같은 그런 망건이다. 이때 沈씨는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망건을 가져다 찻잔 앞에 내려놓았다.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 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 <檀君殿>의 내력
沈씨의 설명 도중 필자는 자주 화살표를 꽂아야 했다.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가닥을 잡기 위해서 그러했다.
▲ 현재의 심수관요 입구 모습 |
△ 沈 = 거기엔 기막힌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심씨 설명을 들어 보자. 당초엔 단군전(檀君殿)이었으나 명치유신을 맞아 폐쇄명령이 내려졌다. 일본 군벌이 <단군>이란 조선의 사교라며…. 이때 도공들은 대책을 논의한 끝에 교쿠상구우(玉山宮)라 명칭을 바꾸고 일본의 건국신 <니니기노신(尊)>을 모시기로 했다.
니니기노신하면 일인들도 도래계(한민족)라 믿고 있다. 잡혀온 도공들은 고향이 그리울 때면 이 산에 올라 고향 쪽을 향해 향수를 달랬다. 헌데 묘한 일이 생겼다. 바다건너에서 불덩어리(火光)가 날아와 산봉우리에서 몇 밤을 머물렀다.
도공 중 태점(太占)을 치는 이가 있어 점괘를 짚어 보니 이 <화광>은 한민족의 시조 단군(檀君) 신령으로 도공들을 지켜주기 위해 백두산에서 날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도공들은 이곳에 사당을 짓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그리고 경사 때면 이곳에 와 제례를 올리는 한편 여행을 떠날 때나 다녀와선 참배를 했다. 또 해마다 8월 보름엔 제례를 올리는데 신관(神官)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그 풍습은 오늘에 이어지고 있으나 가사는 변형(變形)되어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おおるなりい おのりら
まいるいどな おのりら
なるのん ぢるると
오늘날 오는 날이 하루하루가
오늘 이날과 무엇이 다르리
해가 지고 해가 뜬다. 오늘은 오늘 한세상
어느 때나 같은 그날
이 노래는 한 맺힌 조선도공들의 절규요, 동시에 체념 어린 탄식이라 할 수 있다. 아니 각혈(?血)처럼 아픈 피울음에 다름 아니었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 가사는 제목 자체가 <오노리소>로 변해 조선어도 일본어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로 이어온다.
▲ 조선도공들의 긍지
沈씨의 설명뿐 아니라 여러 자료에서도 그들 도공들의 자존(自尊)은 여지없이 드러나 있다. 이들은 <명치유신>때까지 망건에 두루마기차림으로 생활해왔다. 뿐만 아니라 언어와 혈통, 조선의례(儀禮)를 지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도쿠가와(德川) 막부시절 이야기다. 1789년대 교토(京都)에 <다치바나 낭케이>라는 명의가 있었다. 그는 여행가요, 문필가로 평소 <나에시로가와(苗代川)> 조선도공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때 도공들은 沈, 李, 朴, 卞, 林, 鄭, 車, 姜, 陳, 崔, 盧, 金, 白, 丁, 河, 朱 등 17성 40여명이 살고 있었다. <다치바나>는 이곳을 여행하고 나서 서유기(西遊記)라는 기행문을 펴낸 인물이다. 그 책자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다치바나>가 도공들을 방문했을 때 <처음 뵙겠습니다.>하자 도공 중 한 사람이 <신무둔이외다!>라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한학에 밝은 다치바나 <그것 참! 희한한 성씨로군요?>하자 신씨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지금 쓰는 성, 伸가는 조선엔 없는 성(姓)으로 원래는 申씨라고…. 선대가 포로로 잡혀와 태수(領主)를 알현(?)할 때 명부를 읽어 내려가던 왜국관원이 원숭이입니다(お猿です)라고 소개한 것이다.
잔나비 띠가 원숭이라 해서 그것을 십이지(十二支)로 직역, 원숭이라 불렀다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당시 왜국관원의 통역솜씨가 그러했다. 이에 수모를 느껴 申변에 사람인(人)자를 붙여 伸씨라 했다는 것이 아닌가. 심수관씨 설명도 그렇거니와 <다치바나>의 <서유기>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이렇듯 사츠마 조선도공들의 긍지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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