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운하 소설가 |
우리말 ‘경험’과 영어의Experience에 해당되는 단어는 전자, Erfarung이다. 이 단어는원래 ‘여행하다’ 는 의미를 지닌 파렌(Faren)이라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즉 이 경험은 많이 여행하며 겪은 것들을 성찰을 통해 지성적으로 내면화시킨 경험을 의미한다. 이는 감각적 경험이 지적이고 내면적인 반성을 통해 고유한 특성을 가지게 되는 지속성과 응집성을 가진 경험이다.
반면 한국어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단어가 없는 Erlebnis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나는 이 경험을 ‘외험(外驗)’ 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외험은 대단히 표피적인 인상적 반응에 불과한, 그래서 혼돈된 지각 경험이다. 불규칙하고 우연적이고 무계획적인, 대도시의 시내버스를 타고 바깥에 펼쳐지는 풍경을 스치듯 구경하며 지나가거나 번잡한 도심 거리를 휘리릭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경험들이다. 그런 외험들은 의식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기보다, 감각을 지나 곧장 무의식의 영역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거나 또는 순식간에 스쳐지나가 쉽사리 망각되어 버리는 그런 것이다.
한 마디로, 외험은 망각의 체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험이란, 실제로는 반경험(反經驗)의 체계다. 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현대의 거대한 대도시에서의 삶을 경험에서 외험으로의 이동상황으로 보았다. 벤야민에게 도시는 외험이 발흥하고 경험이 사망하는 장소, 경험이 너무나 파편화되고 즉각적이고 순간적이며 무차별한 나머지 이미지로만 남게 되는 그런 장소를 의미한다.
내가 서글퍼지는 까닭은 벤야민이 지적한 것처럼 내 삶이 경험이 아닌 외험들로 채워지고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늘 바쁘다 바뻐, 하며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그 바쁨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런 바쁨들이 과연 내 삶을 얼마나 깊고 넓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인지.
사실 시간과 속도에 내몰리는 현대인들에게는 모든 접촉과 작용들을 깊이 성찰하고 숙고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반경험의 체계로서 작동하는 삶의 방식은 현대적 삶의 필연성인가, 아니면 회피할 수도 있는데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현대사회라는 시스템 자체가 그런 반경험의 체계를 강요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반대하고 저항하며 온전한 삶의 몫을 주장하는 것은 주체의 몫, 바로 개개인들의 의지와 노력의 몫이라는 점일 것이다. 반경험조차도 경험이 되게 하라, 나는 오늘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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