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낙현 대전시 문화체육관광국장 |
우선, 우리가 그녀에게 보내는 관심과 사랑은 서로가 일방적이라는 운명을 가진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대세인 요즘 무슨 말이냐고? 책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만, 우리는 읽고 있는 책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또한 그녀가 주는 영향을 받고 안받고는 또한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 사항이다. 그녀는 어떻게 해 달라고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찾아줄 때까지 조신하게 기다리는 옛 여인의 덕목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나의 일방적인 무관심이나 거절에 상처받지 않는다. 나 또한 별다른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누구나 흔히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고 여기지만, 가끔 하드커버에 두꺼운 외양을 갖추고 심하게 재미없는 그녀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땐 고민할 필요 없이 책장을 탁! 덮으면 그만이다. 도서관이나 지인에게 잠시 빌려온 그녀라면 곧장 반납해서 다른 대출자와 괴로움(?)을 나누면 되고, 돈을 주고 산 경우라면 책장에 장식용으로 꽂아두었다가 재활용장터나 도서교환행사에 내놓으면 된다. 이런 경우에도 그녀에 대한 애정이 아무런 의미 없이 무시되는 것만은 아니다. 지구도 살리고 문화도 살리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지 않은가.
얼마 전 상영된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 등장하는 매력적이고 엉뚱한 여주인공의 취미는 ‘헌 책 모으기’다. 헌 책의 냄새를 좋아하고, 그 책 전 주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도서관의 오래된 책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정적이 감도는 서고에서 오래된 그녀의 냄새를 맡으며 그녀 사이를 서성이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 속의 번잡함이 걷힌다.
서점에 가면 계산대 옆에 있는 북마크(bookmark)에 손길이 간다. 맘에 드는 북마크를 손에 넣으면 내 곁에 두고 싶은 새로운 그녀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아! 내가 그녀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니?”누구에게 속삭이지 않아도 가슴 뿌듯한 나만의 짝사랑이다.
누구의 삶인들 쓸쓸하고 외로운 면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인가. 정호승 시인의 말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그녀는 외롭고 쓸쓸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위안을 준다. 밤새 포근하게 안아주고, 내일 다시 삶의 전장으로 씩씩하게 나설 수 있게 등을 토닥여 준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먼지 많은 저잣거리에서 술잔을 부딪치는 것 못지않게 무리에서 떨어져 그녀가 안겨주는 침잠의 평화와 지혜의 숲 속으로 은둔하곤 한다.
23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책의 날이다. 그녀의 생일에 괴테의 시 한 구절을 빌려 소박한 헌사(獻辭)를 바친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땅에는 꽃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랑이 있다’는 구절에 ‘사랑’ 대신 ‘책’이라는 말을 써 넣는다. 사람에게는 책이 있다. 그녀의 그윽한 눈길이 편편히 날리는 꽃잎 사이로 우리를 기다리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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