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버린 광복군 흔적... 독립운동 제2성지 '무색'

묻혀버린 광복군 흔적... 독립운동 제2성지 '무색'

[임정90주년]승리의 역사를 가다 7부, 1만5000리 역사투쟁(하)

  • 승인 2009-11-26 10:07
  • 신문게재 2009-04-17 13면
  • 류조우류조우
1932년 상하이를 극적으로 탈출한 임시정부는 8년만인 1940년 중국 전시수도 총칭(重慶)에 입성한다. 임시정부는 이 기간 무려 8차례나 정부를 옮기면서 한편으로 독립운동을, 다른 한편으론 피난을 다녀야 했다.

총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주체로서 역량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더욱이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터지자 독립의 의지와 의욕은 더욱 충만해졌다. 반면 2년 가까이 계속된 중일전쟁에 일본군은 피로해졌다. 진격의 기세도 둔화됐고, 전쟁은 장기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총칭에서 안정을 찾고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쳐간다. 우선 직할부대인 광복군(시리즈 10부‘우리힘으로 광복을’에서 후술)을 만든다. 비록 외국땅이지만 당사국이 공식인정한 우리의 군대가 만들어지고 육성된다. 광복군에는 그동안 임정에 대립각을 세웠던 조선의용대(시리즈 12부‘왜놈상관을 쏴죽이고 조선의용대로 오시요’에서 후술)도 참여한다. 좌우가 뭉친 것이다.

근대민족국가 건설을 담당할 정치주체로서의 국가건설론(시리즈 13부‘임시정부가 만들려한 대한민국’에서 후술)이 마련된다. 소아를 버리고 대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임시정부로의 통합(시리즈 11부‘좌우연합정부의 수립’에서 후술)도 결실을 맺는다. 임시정부는 성숙된 정치적 식견을 기반으로 연립내각을 구성했고 절충과 타협에 입각한 민주정치 원리를 구현해 나갔다. 당연히 임시정부의 위상도 크게 강화됐다.

임시정부는 총칭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기를 갖는다. 상하이시기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만들었다면, 총칭시기는 구체적인 독립민족국가를 구상하고 가다듬는 시기였다.

▲전시수도 총칭으로
류조우(柳州)에 있던 임시정부는 광복진선 청년공작대 구성외에는 무기력한 시간을 보냈다. 류조우에 도착하면서 중국의 전시수도인 총칭으로 진출하기 위한 임시정부의 노력은 계속되고 5개월만에야 빚을 본다.

당시 임시정부를 옮기기 위해서는 100여명이 넘는 임정요인과 가족, 그리고 임시정부를 따라나선 한인동포의 이전대책이 필요했다. 임시정부는 우선 국민정부에 자동차지원을 요청해 대형버스 6대를 지원받는다. 지금이야 버스 6대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이를 지원받는 것이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는 전쟁중이다. 군수물자를 실어 나를 차량조차 부족한 판이었다. 중국 전시교통국이 보유한 100여대의 버스 가운데 6대를 빼내어 준 것은 그만큼 임시정부의 중요성이 높았다는 얘기다. 버스에 사용할 휘발유를 지원조차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1939년 4월 임시정부 일행은 류조우를 떠나 쓰촨(四川)성 치장으로 향했다. 임정요인 등은 6대의 버스에 나눠 탔는데 당시 도로는 비포장인데다 여러 상황이 열악한 구이조우(貴州)성을 가로질러 험한 산악지형을 통과해야 했다. 오히려 뱃길이 안전한 편에 속했다. 류조우를 떠난 버스는 구이양(貴陽)을 거쳐 치장까지 8일이나 걸려 도착했다.

현재도 기차로 18∼23시간이 걸리는 구간으로‘백리마다 풍속이 바뀐다’는 거대한 땅덩이 중국에서 버스로 8일간의 여행은 고역 그자체였다. 중간에 버스가 고장나면 뒤처졌다 따라오는 식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시수도를 향했다. 험준한 산길을 지날때면 버스가 도랑에 빠져 넘어지거나 빗길에 미끄러져 아찔한 고비를 여러차례 넘겨야 했다.

취재중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총칭으로 다시 상하이로 이동한 거리를 철로를 기준으로 환산해 봤는데 모두 6389㎞였다. 무려 1만5000여리에 달했다. 이동거리(표 참조)는 상하이를 탈출해 항조우까지 203㎞, 다시 쩐장까지 440㎞, 난징까지 63㎞, 우한까지 540㎞, 창사까지 362㎞, 광조우까지 707㎞, 류조우 824㎞, 치장까지 987㎞, 총칭까지 96㎞ 등 4222㎞에 달했다. 여기에 일제의 패망 이후 환국을 위해 총칭에서 상하이로 이동한 거리가 2167㎞다.

당시 임시정부는 창강(長江)을 따라 뱃길로 창사까지 이동하고 이후에는 기차와 버스, 선편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함에 따라 실제 이동거리는 이보다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시정부는 우선 총칭과 가까운 치장에 안착한 뒤 1940년 11월 총칭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4번이나 청사를 옮긴 끝에 현재 기념관이 들어선 연화지청사에 정착해 본격적인 독립민족국가를 준비한다.

▲ 중국 정부가 발행한 한국인 신분증.
▲ 중국 정부가 발행한 한국인 신분증.
▲전시체제 임정의 정비
임시정부는 1939년 5월 치장에 자리를 잡으면서 급속히 안정을 되찾고 1940년 9월 총칭으로 입성한 이후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진전을 실천한다. 앞서 밝혔지만 그중 하나가 광복군의 창설이다. 김구는 이해 3월 광복군성립계획을 장제스(蔣介石)에게 제출해 이를 승인받은 한편 6월에는 군사특파단을 시안(西安)에 파견해 활동을 전개한 상태였다. 임시정부는 패망하는 일본과 전면전을 위한 광복군 육성에 들어간다.

1941년에는 삼균주의에 입각한‘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한다. 외교정책도 강화해 미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회를 설치한다. 이어 12월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다음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1942년 6월에는 국기양식의 통일안을 발표하고, 10월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의식을 발표하는 등 국가로서의 형식과 틀을 만들어간다.

1943년에는 영국군의 요청에따라 인도와 미안마에 전구공작대를 파견했다. 이는 중국군을 제외한 연합군과의 최초의 합동작전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연합국에게는 한국군과의 합동작전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계기이기도 했다.

일본군에 대한 초모활동도 활발해져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한국 청년들이 속속 광복군으로 넘어온다. 이들이 광복군이 된다는 것은 일본으로서 2배의 전력손실을 의미했다. 광복군이된 징집병들은 또 다시 초모활동에 참여해 일본군의 전력을 약화시켰다. 일본군의 군 기밀과 특히 암호체계를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광복군은 1945년 가장 활발한 전열정비를 가다듬는데 독자적인 표식과 제복규정도 마련된다. 2월에는 독일에도 선전포고를 하고, 3월에는 광복군과 영국군 사이에‘한국 광복군 인도연락대 파견에 대한 협정초안이 체결된다. 4월에는 김구주석이 광복군과 미국 OSS의 군사합작을 승인하고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 제1기 OSS훈련을 시작해 3개월만에 훈련을 완료한다. 조국광복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 임시정부는 전시수도 충칭에 입성해 오사야항 등 4번에 걸쳐 청사를 이전해 현재 기념관이 세워진 연화지 임시정부청사를 사용한다.
▲ 임시정부는 전시수도 충칭에 입성해 오사야항 등 4번에 걸쳐 청사를 이전해 현재 기념관이 세워진 연화지 임시정부청사를 사용한다.

임시정부의 제정규모도 확보되는데 이역시 총칭에 정착한 이후였다.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이 공식화되었고 임시정부의 재정기구와 회계제도도 부활됐다.

임시정부는 수립초기 인구세(人口稅)와 애국금을 주요 재원으로 삼았다. 부족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였고 외국으로부터 차관도입도 계획했다. 하지만 독립은 요원했고 재외동포의 지원마저 중단되고 일본의 힘은 더욱 강해지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임시정부 살림을 꾸렸던 김구는“경제적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도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 집주인에게 여러번 송사를 당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백범일지에 소회하고 있다. 심지어 김구주석이 식사때면 동포의 집을 기웃거렸던 일은 임시정부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어 왔는지를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총칭에서 중국국민정부는 임시정부에 월 경비를 지원했는데 1945년 4월에는 월 100만 원이던 지원금이 300만 원으로 인상된다. 하지만, 이같은 국민정부의 재정적 의존은 임시정부의 독자성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류조우,치장,총칭=맹창호기자 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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