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일구 호서대 총장 |
비판은 예리하고 질타는 통쾌하다. 하여, 외양(外樣)은 꽃처럼 화려하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은 악마의 정원에 피는 꽃이라고 하였던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달리 대안 없는 비판과 원망이야말로 꽃은 꽃이로되 꽃잎 너머 악마의 모략과 사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하지만 조직과 공동체는 ‘몸’과 같아 얼마나 연약하고 예민한가. ‘지체’ 하나만 병들고 아파도 ‘전체’가 중병에 시달린다. 하여, 작은 불평과 원망일지라도 모두를 재앙과 불행으로 인도하기 십상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이치가 더욱 그러하다. 지난 날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교훈이다.
어느 날인가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느니라!”(마태 15:14). 소경이란 누구인가. 도무지 누가 장님이란 말인가. 세상에 일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자신의 모순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과오에 눈을 감아버리는 이들이 소경이다. 제 탓을 모르면서 남을 탓하기만 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다 장님인 것이다. 이들이 불평과 원망으로 다중(多衆)을 이끌면 모두가 재앙을 당한다는 가르침이다.
어려운 날 어두운 마음에 등불을 켜줄 이 누구인가. 소경의 캄캄한 그 길에 등불을 밝혀 오가는 모든 이의 걸음에 빛을 줄 자 누구인가. 어두울수록 빛 되고 어려울수록 힘 되는 것은 긍정의 태도, 감사의 생활이다. 어떤 이는 장미를 보고 왜 가시가 있느냐고 불평하지만, 어떤 이는 가시 중에도 장미가 있는 것을 감사한다. 인류의 첫 번째 범죄는 감사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계의 대 문호 셰익스피어가 일갈(一喝)하였다. “감사를 모르는 자식이여, 독사의 혀만큼이나 잔인할 것이라!”
감사하는 마음의 밭에는 결코 절망의 씨가 자랄 수 없다. 헬렌 켈러는 말하기를, “나의 약점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한다. 이를 통해 나를 알았고 나에게 주어진 일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감사는 모든 덕행의 어머니다. 감사는 영적, 정신적 건강의 지표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늘 가난하지만, 감사할 줄 아는 이에겐 행복이 배가된다. 그러므로 감사는 축복을 두 번 즐기는 것이다. 받을 때 한 번, 회상하며 또 한 번…
생각해보면, 개인의 행복이 성취와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동체의 복지가 예리한 비판과 통쾌한 질타로 말미암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평의 벽을 허물고 긍정과 감사의 덕을 발휘할 때 복지는 증진된다. 남의 허물을 나의 옷자락으로 덮을 때 은덕(隱德)은 뫼처럼 솟는다. 나의 허물을 아픈 가슴으로 겸손히 뉘우칠 때 맘속의 평정심은 마침내 태평세상을 이룬다. 어두운 날의 등불 되어 우리의 어려운 세상을 환히 비출 자 누구인가. 삶이 핍절하여 신음하는 가련한 인생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 던질 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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