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네트워크를 갖지 못한 지방지로선 취재가 불가능했지만 지난 76년 필자는 그 기회를 맞았다. 문화부장 출신이 정치사설, 정치칼럼을 쓰다 보니 행운(?)이 찾아든 셈이었다. 한 · 일 의원연맹 도쿄대회 취재차 건너간 게재에 소망(?)을 이룬 셈이다.
JP는 이렇게 외쳤다. <옛날 정치는 먼 자와 손을 잡고 가까운 이웃을 치는 소위 원교근공(遠交近攻)수법을 구사했으나 이젠 먼 자와 손을 잡고 가까운 이웃과는 더욱 가깝게 공존해야 한다는 명제 앞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라고 설파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제1부 행사를 마치고 필자는 이병희 간사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일어에 자신이 있다 손치더라도 일국의 대표라면 통역을 내세우는 게 상식 아닙니까?>했더니 이병희 간사장이 발끈했다. JP는 설득력이 좋기 때문에 일어로 해야 효과가 난다해서 그리했다고….
▲ 한 · 일 의원연맹 도쿄대회
2부 행사는 다음날 동양 최대의 <아사쿠사(淺草)>극장에서 열렸다. 일본 측에선 <조로쿠다이코(助六大鼓)>에 엥카(演歌)와 춤(오도리)을, 우리 측은 정연희(가수. 이미자 여식)의 노래, 부채 춤 등을 들고 나와 흥을 돋우었다.
이때 필자가 또 한마디 참견했다가 이병희 간사장으로부터 지청구를 얻어먹었다. 단상에 그려 붙인 현수막에 사쿠라가 무궁화꽃을 누르고 있다며 꼬집자 이병희 간사장이 버럭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정말 귀찮게 구는구먼! 자질구레한 문제를 갖고…. 이래서 사람들이 신문기자를 싫어한다니까!>라며 역정을 냈다.
또, 한 가지 추억거리가 있다. 대회장 분위기를 메모하던 필자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메인테이블의 양국지도자 대열에 끼어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다는 충동….
사진기자와 양국 의원들 그리고 내빈으로 꽉 차 장내는 발을 들려놓을 틈 사이가 없다. 그래도 파고들려는데 누군가가 팔꿈치로 필자 옆구리를 쿡 치며 짜증을 냈다. <어디라고 끼어들어!>라기에 쳐다보니 그는 통일당 박병배 당수였다.
당수도 못 끼는 메인테이블에 <일개 신문기자가!?> 아마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염치없이 파고들었다. 카메라맨의 바지가랑이 사이로 파고들고 보니 바로 메인테이블이 아니던가. 연신 터지는 플래시 앞에 정신을 가눌 겨를이 없다. JP 옆에 끼어 샴페인 잔을 들었다.
제 1부는 그렇게 끝났는데 귀국 후 묘한 반응을 일으켰다. 하루는 언론 담당 기관원이 전화로 세상 뒤집힐 일이 생겼다며 나오라기에 만나보니 그는 <여보! 도쿄대회 때 일을 냈더구먼!>하기에 기사(기행문)에 문제라도 생겼나 했더니 그는 필자에게 화보 하나를 내보였다.
오늘의 한국(今日の韓國) 화보인데 도쿄대회 때 사진을 컬러로 대문짝처럼 다루고 있다. 필자 옆에 JP-후쿠다(福田) 수상, 오히라(大平) 전 수상, 다나카(田中) 전 수상 중 필자 얼굴이 제일 크게 나와 있는 게 아닌가. 마치 주역처럼….
<그 사람(필자) 일낼 사람이구먼!>하며 기관의 장이 말하더라는 것이다. 우쭐해진 기분에 필자는 저녁 값을 치른 일이 있다. 대회를 마치고 필자는 언론인이요, 작가인 <미즈오카(光岡明)>씨를 찾아갔다. 그는 도쿄 역전 어느 빌딩에 있었다.
필자를 반기는 미즈오카씨. 그는 다케다(武田全)시인의 제자로 나오카상(直木賞)을 탄 소설가다. 다케다시인은 일제말 서산농림교장을 지낸 바 있어 우리 두 사람은 친할 수 있었다. <풀과 풀 사이(草と草の距離)>라는 장편소설 필자 미즈오카씨. 그의 소설을 번역해서 팔아먹겠다고 하자 마음대로 하라며 웃어넘긴 일이 있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실행을 못해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는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단골집에서 밤늦도록 정종 잔을 비운 일이 있다. 그가 필자의 향후 스케줄을 물어오기에 큐슈 남단 <가고지마(鹿兒島)>에 갈 생각이라 했더니 <어째서 그 먼 곳엘?>하고 되묻는다.
<사츠마요>의 진주캉(沈壽官) 인터뷰 계획을 밝히자 <알만 합니다>했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올라오는 길에 <구마모토>에 들러 <타마나군(玉名郡) 후나야마(船山)고분 취재를 권하는 것이었다. 공주 무령왕릉 출토품과 후나야마(船山) 고분유물이 판에 박은 듯 같다며 필시 백제와 깊은 인연이 있을 거라며 좋은 기행문을 쓰라고 권한다.
이와 같은 인연 탓에 필자는 의외의 소득(?)을 취한 셈이다. 심수관 인터뷰와 사츠마 도요를 취재하고 올라오는 길에 후나야마 고분을 찾아갔다. 이 고분을 국내에 맨 먼저 터뜨린 건 필자였다는데 보람을 느낀다. 이로 인해 공주 - 기쿠스이(菊水町)결연, 4년 후엔 충남도와 구마모토(熊本) 현이 확대결연으로 이어졌다.
필자는 작으나마 한 · 일간의 가교노릇을 해온 셈이다. 그 바람에 <현해탄은 말한다>라는 졸저(拙著)를 펴낼 수 있었다. 이후 90여회 일본취재를 한 결과 <일본통>이라는 <닉네임>까지 얻게 된 셈이다. 일본 문화탐사하면 <계룡장학회 해외문화탐사팀>의 활동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인구 명예회장이 진두지휘, 놀라운 성과를 거뒀기 때문인데 이 문제는 따로 다룰 계획을 갖고 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사츠마 취재 길에 나섰던 필자. 마치 벼슬길에라도 오른 듯 들 떠 있던 시절이야기다.
▲ 조선도공 14대손 沈壽官
소설가 미즈오카씨와 만난 다음날, 필자는 하네다(羽田)공항에 나가 남단 <가고지마>표를 사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날 태평양에서 태풍이 북상, 이착륙이 어렵다 해서 큐슈 중간지점 <구마모토>공항 티켓을 손에 넣었다. 1시간 남짓의 거리였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고 <남쪽으로! 나에시로가와(苗代川)로!>를 연발했다.
<가고지마>는 초행길이 되어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택시는 공항을 빠져나왔으나 어찌된 일인가? 입구부터 2차선 도로에다 시속 80km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아뿔사!?> 오판을 한 것이다. 후쿠오카 - 가고지마 간은 종단(縱斷)선인데 중간지점 구마모토까지는 고속도로였으나 그 아래는 2차선, 거기에 주행속도까지 제한하고 있다.
초행이라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주 다니던 후쿠오카-구마모토는 1시간 30분 거리, 지도를 펼쳐보니 거의 같은 거리라고 목측(目測)을 한 게 잘못이었다. 심수관(沈壽官)씨에게 오후 3시로 약속한 게 실수였다. 택시는 80km 속도로 질주한다. 목적지까지 3시간 남짓 걸릴 것이라는 게 기사의 예측이다. 약속시간은 이렇게 파기된 셈이다.
이젠 택시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핸드폰도 없는 시대였다. 한 시간 반쯤 달렸을까. 시장기가 돈다. 세계적인 도공, 조선도공 후예를 만난다는 생각에 배고픈 줄도 몰랐다. 도중 휴게소에서 운전기사에게 도시락을 사주는 여유(?)까지 보인 필자. 점심을 그렇게 때우고 한동안 달리는데 택시기사가 말했다.
거의 다 온 듯 싶은데 안내판이 보이질 않는다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윽고 <사츠마요 발상지(薩摩?の發祥地)>라는 간판이 보이는데 <나에시로가와(苗代川) 지명이 나오질 않는다. 구마모토 운전기사라서 <가고지마>는 아무래도 생소한 모양이다. 택시에서 내려 사츠마도요 발상지라는 안내판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지명까지 바뀐 지 오랜듯했다. 지명이 미노야마(美の山)로 바뀐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미노야마> 안내표시가 금시 나타났다. 조그마한 마을이다. 온통 숲으로 뒤덮인 마을. 민가는 왕대(孟宗竹)밭의 연속이었다. 마을 입구에서 <진주캉(심수관)>댁을 묻자 곧장 질러가면 정문이 조선기와로 된 집이 심선생 댁이라 가르쳐준다.
빵! 빵! 택시가 클락션을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건장한 중년 남자가 대문 밖으로 나오며 <어서오세요> 정중히 맞는다. 택시 요금은 자그마치 4만 몇 천엔인데 그 요금이 아깝지 않은 건 무엇 때문일까. 건장한 체구에 검은 테 안경, 턱수염이 무성한 심수관씨, 집안으로 필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양반집 대문이지요.(これがやんばんの門です)>자랑한다.
뜰에 들어서니 NHK카메라가 구석구석을 찍어댄다. <미안합니다. 한국 언론인인데 심선생 취재시간을 할애 받고 싶은데….>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양보하겠다는 뜻이다. 응접실에서 찻잔을 마주하고 있는데 심수관씨는 이렇게 화두를 꺼낸다.
<도착시간이 한참 지나 내심 불안해졌습니다.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해서….> 그리고 NHK에선 <심수관 한국역사기행>이라는 테마로 드라마를 제작 중이라 했다. 대구 근교 <우록동>에서 심수관 자신과 한국의 김씨가 서로 껴안는 신(Sean)을 미구에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내용은 이러하다. 임진란 때 일본에 잡혀온 심씨 14대손 즉 심씨 자신과 당시 침략군이던 일본 장교가 역으로 조선에 망명한 14대 손이 만나는 장면이 <클라이맥스>라고 한다. 이를 위해 NHK가 지금 촬영 중이라며 <일대 ‘로망’이 될 것입니다>. 벌써부터 여론이 들끓는다며 심씨는 흥분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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