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운하 소설가 |
고대 희랍의 호메로스 시대, 그 꽃은 포에티쿠스(poeticus)라 불렸다. 그 단어는 마비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나르케인(narkein)에서 유래된 것이다. 강하고 매혹적인 향기 탓에 호메로스는 “아름다운 소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덫인 수선화” 라고 노래했다. 그 꽃은 이슬람 세계에서도 사랑을 받았다. 모하메트에게 수선화는 동경에 가득찬 사랑의 상징이었다.
아랍상인들이 남쪽 실크로드를 통해 그 꽃을 당나라에 전했다. 처음엔 나르키소스를 한자로 표현한 이름으로 불리다가 어느새 새로운 이름을 얻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수선이다. 물가에 사는 신선, 水仙! 난초와 비슷한 잎새, 그리고 수선화꽃이 풍기는 고아한 이미지가 난초를 연상시켰고, 거기다 귀하기도 했으니 어불성설은 아니다.
정조 시대, 조선에선 갑자기 수선화 바람이 불었다. 당시 청나라 귀족층에서 수선화가 고가의 관상용품으로 길러지던 유행이 전해진 것이다. 조선의 고관대작들 사이에 비싼 청자화분 같은 데다 수선화를 기르는 것이 큰 유행이 되었다. 1800년대를 전후하여 수선화와 관련된 일화를 남긴 선비들이 많다.
추사 김정희는 평양에 들렀다가 청나라에 다녀온 사람들을 통해 수선화를 얻자, 그것을 청자 화분에 옮긴 후 긴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에 은거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한테 보냈다. 다산은 그 화분을 받고는 감개무량한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짓는다. 오래전, 귀양을 떠나기 전에 지인에게서 받은 수선화 화분이 떠올랐던 탓이다.
추사 김정희는, 얼마 후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깜짝 놀란다. 한양에선 그토록 비싼 고가의 꽃인 수선화가, 그곳에선 발에 차일 정도로 흔하디흔한 꽃이었던 것이다! 제주도에는 자생종 수선화들이 자라고 있었다. (몽고제국을 통해 들어왔을 지도 모른다) 김정희는 그 기막힌 이야기를 한양에 있는 벗에게 편지로 써서 보냈다. 그래도 추사 김정희는 수선화를 무척 사랑하고 아낀 나머지 많은 수선화 그림을 남겼다.
김정희와 절친했던 화가 소치 허련도 김정희가 그린 수선화 그림을 탁본으로 떠서 남기고 있는 것이다. 정조시대만 하더라도, 수선화 화분 하나를 사려면, 요즈음 아주 비싼 난초 화분 값 이상으로 비싼 값을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요즘은 고작 몇 천원이면 아름드리 화분을 살 수 있다. 이즈음 수선화 화분을 한 두개쯤 사서, 옛 고관대작들의 정취를 떠올리며 완상하는 일도 즐겁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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