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복 변호사 |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법조인들도 어떤 면에서는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조에 있을 적에는 재야의 입장이 남의 일 같아 보이더니 재야로 나오기가 무섭게 쉽게 수긍이 가고 동감하게 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배려의 마음이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돌변이라도 한 것인지. 염치도 없이 과거의 인연에 연연하고 싶어지고 허황된 기대감마저 갖고 된다. 그래도 재조의 공정함에 대하여는 허심탄회한 박수를 보낸다. 다만, 수임한 사건이 의뢰인의 요청대로 척척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 줄 알면서도 “발등의 불”이라고 당장 닥친 시급한 현안을 풀어갈 방법이 막연하다보니 모순되고 위선적인 생각마저 하게 되는 것 같다.
이중 잣대로 재려드는 성향은 어느 곳 누구에게나 있다고 본다. 자신이나 제 편의 일에 대해서는 가급적 수긍하고 너그러이 이해하는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도 싫어하는 남이나 반대편의 일에 대하여는 삐딱하게 바라보거나 꼬투리 잡아 훼방이라도 놓으려 드는 것이다. 이기심의 발로이고 잘못된 라이벌의식이다. 분명한 것은 그러나 세상에는 이러한 이기주의자보다는 공정한 눈, 객관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삐뚜로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사 모두가 착색되어 보인다. 입장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공정한 눈을 가지고 아무리 바른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도 때로는 부득이한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눈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것은 반드시 지켜야만 옳은 줄은 알지만 세상사 절대 선이나 절대 악은 절대로 없다. 강하면 부러지는 것이 세상이치이다. 유연성의 정도가 문제이지만 적당한 여유는 있어야 한다. 사람이 바로 선 모습이 “S”자의 모양이듯이 그 정도의 여유는 가져도 된다. 그것이 바로 마찰을 줄이고 세상을 부드럽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라고 생각한다.
한계는 분명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된다. 변호사라는 직업으로 인하여 자칫하다가는 사건에 따라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수도 있게 생겼다. 의뢰받은 사건의 해결방식이나 보수결정에 있어서나 항상 같은 기준만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서로 다른 저울추, 서로 다른 됫박을 쓰는 것, 이것은 모두 야훼께서 역겨워하시는 짓”(잠언 20장 10절) “야훼께서는 두 가지 저울추를 쓰는 것을 역겨워하신다.“(잠언 20장 23절). 자칫 야훼께서 역겨워하시는 짓을 저지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법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며 조롱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법이란 가급적 동일한 잣대 공정한 잣대이어야 한다. 공정하고 보편타당한 판가름이 통하는 정의사회의 구현을 위해서라면 이중 잣대는 버려야 할 악물(惡物)이다. 기준이 다르다면 기준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상대에 따라서는 이중 잣대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연민의 정인가 실질적 정의의 구현을 위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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