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재동 충남대 명예교수 |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몇몇 아주 유명한 소설가에 의하여, 바로 이 심청전은 박살이 나고, 따라서 심청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들은 고전소설의 현대적 재창조라는 명분과 소설 창작의 절대적 자유를 마음대로 휘둘러 심청전을 성매매 통속소설로 창작해 냈다. 따라서 심청은 남경 장사 뱃사람들에게 몸이 팔려 중국 해안의 용궁이라는 요정에서 수많은 남성들한테 처참하게 짓밟히는 창녀가 되었다. 나아가 심청은 이제 능동적으로 몸을 파는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창녀로 변신할 뿐만 아니라, 인기 높은 창녀를 모아서 제일급 포주로 행세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중국을 비릇한 동아시아 해안의 매음지대로 그 무대를 넓히기도 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놀라고 민족이 노할 일이다. 참으로 민족문화사의 이름으로 통탄할 현상이다. 물론 소설이 윤리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소설가의 자유자재하고 무소불능한 창작의 권능을 족히 인정한다. 그리고 소설은 사랑·성애 그 이상의 통속적 인간 내면을 적나라하게 그려 내도 얼마든지 좋다. 그런데 왜 하필 심청전·심청을 이렇게 참혹하게 파탄·파멸로 몰고 가야만 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유명세와 ?심청전?·심청을 가슴에 새긴 민족·대중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작품 상의 파괴적 변혁을 일으킴으로써, 충격과 분노 속에 모두가 그 작품을 읽어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너무도 지나친 통속주의·상업주의의 전형적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만에 하나 「춘향전」이나 「사씨남정기」를 그런 수법으로 통속화하여 춘향이나 사정옥을 창녀·포주로 그린 소설작품을 써 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작품이 간행·유통되는 즉시 굉장한 난리가 일어 날 것이 뻔하다. 그 작가들이 아무리 대단하고 아주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도, 그들은 남원 군민이나 광산김씨 문중에 의하여 큰 봉변을 당할 것이고, 그 작품은 파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영리한 작가들이 이런 고전소설에 섯불리 그 따위 통속적 마수를 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어찌「심청전」에 대해서는 감히 그런 짓을 저질렀는가. 이 작품에는 위와 같이 엄중한 임자가 없기 때문이다. 허지만 「신청전」의 임자는 우리 민족·민중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이러한 민심은 구체적인 반응이나 특별한 응징을 표면화하지 않기에 깔보기가 쉽다. 그러나 민심은 천심이라 하늘의 뜻을 더욱 두려워 해야 될 것이다.
실제로 역사·고전에 입각한 소설 창작에는 최소한의 필수적 기준과 논리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창작이라도 정몽주나 이순신을 역적·간신으로 그릴 수 없듯이, 춘향이나 사정옥을 창녀·포주로 그릴 수 없듯이, 심청을 창녀·포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폭력적 통속화 추세는 민족·민중이 분노하고, 민족문화사·문학사가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청전'의 원형·원본을 추구하고 심청의 본래 면목을 갈망하는 민족적 문학 역량이 결집·승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기에 뜻있는 학자들은 일어서서 그 재창조의 이론과 방향을 올바로 제시하고, 작가들은 발분하여 심청을 민족적 효녀, 불교적 성녀, 이상적 여인상으로 거룩하게 부각시키는 장편 '심청전'을 창작할 때다. 그때의 ‘심청황후’를 위하여 학문적·문학적 역량을 총합시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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