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청천(왼쪽)과 홍사익 |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탄하자 일본육사에 재학 중이던 한국유학생들은 인근 묘지에 비밀리에 모여 진로를 의논한다. 모임에서는“당장 때려치고 독립운동에 나서자”는 김광서의 주장과 “배울 것을 배우고 실무와 실전을 경험하자”는 홍사익의 주장이 맞선다. 이들은 육사를 졸업해 의무복무 기간이 끝나면 조국광복에 헌신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훗날 이 약속을 지킨 유학생은 지청천과 이갑, 김광서, 조철호, 이종혁 등 몇 명에 불과했다.
일본군 소위에 임관한 지청천은 칭따오(靑島)전투에 참여, 중위로 승진한다. 하지만, 1919년 3.1독립운동이 터지자 출세가 보장된 일본군장교 대신 망명객을 선택한다. 일본 육사 교범을 모두 챙겨 탈영한 그는 단신으로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찾는다. 이때부터 청천 지석규라는 이름 대신 이청천으란 가명을 사용한다.
그가 챙겨온 일본육사교범은 신흥무관학교를 근대적 체계를 갖춘 무관학교 변신시킨다. 특히 일본의 전술을 깊이 연구해 대응전술을 수립한다. 결과 독립군들은 청산리 전투 등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는 신입 생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시다”라며 독립의지를 북돋았다. 지청천은 현재도 참군인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면 출세와 안락한 생활을 버릴 수 없었던 홍사익은 철저한 일본군인으로 변신을 거듭한다. 소위 임관과 함께 일본군인의 선망인 도쿄 제1사단 예하 보병 제1연대에 배속된 그는 1920년 12월 독립군이 되자던 약속 대신 일본육군대학을 선택한다. 이를 졸업한 한국인은 홍사익과 영친왕, 그리고 영친왕의 조카 이건과 이우 등 단 4명뿐이다. 왕족을 제외하면 홍사익이 유일했다.
홍사익은 동기생인 지청천으로부터 여러 차례 독립군에 넘어올 것을 간곡히 권유받지만 이를 외면한다. 그의 아들에게 “광복군에는 가지 않겠다”고 밝힌다. 조국 독립보다는 철저히 일신의 영달을 좇고자 했음을 분명히 밝혔다.
일본으로 떠나던 마지막 관비유학생 44명에게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내렸던 ‘군인칙유(軍人勅諭. 열심히 공부해 돌아와 조국의 간성이 될 것을 명령한다)’ 역시 저버린 지 오래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홍사익의 행동은 민족적 양심의 증거로 악용됐다. 하지만, 자신은 물론 자식에게 평상복조차 반드시‘하오리’를 입도록 했던 그의 이름은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선전용 위증일 뿐이다. 박춘금(제국회의 중의원), 한상룡(창씨개명 건의), 이기용, 이병도 등이 이들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3월. 그는 필리핀 포로사령관(소장)으로 부임했고 그해 10월 중장으로 진급, 병참감으로 루손 섬 산악지대에서 패전을 맞았다. 1946년 4월18일 미군 전범재판소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전범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국내에서 일부 인사들의 구명운동이 있었지만 거절됐다. 그의 시체는 화장돼 바다에 뿌려진다.
황국신민으로 살려 했던 홍사익의 처절한 몸부림은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대표적 친일군인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올리고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맹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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