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해외공작 요원 오스본은 좌천 통보를 받자 사표를 던지고 CIA 생활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다. 아내 케이티는 남편이 퇴직하자 몰래 만나온 애인 해리를 염두에 두고 이혼하려 한다. 이혼소송을 위해 남편 컴퓨터에서 재정기록을 복사해 변호사에게 넘기는데, 사건은 여기서 발생한다. 기록이 담긴 CD를 변호사의 비서가 헬스클럽에 놔둔 것. 헬스클럽 직원 채드와 린다는 CD에 담긴 정보가 중대한 국가 기밀이라 넘겨짚고 오스본에게 돈을 요구하지만 상황은 꼬여만 간다.
오해가 없도록 조엘과 에단, 코언 형제의 이전 작품들을 살펴보자. 데뷔작 ‘블러드 심플’은 필름누아르, ‘밀로스 크로싱’은 갱스터, ‘참을 수 없는 사랑’은 로맨틱 코미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서부극. 장르를 따지자면 그렇다면 거다.
하지만 이 영화들을 장르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코언 표 영화’일 뿐이다. 장르의 틀을 빌려다 쓰되 장르의 문법을 여지없이 비트는 게 코언 형제의 장기다. ‘번 애프터 리딩’도 그렇다. 첩보 스릴러에 스파이가 없다.
연기파 배우 존 말코비치와 프랜시스 맥도먼드, 틸다 스윈튼, 미남 배우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 등 무게감 있는 배우들이 나온다고 진중(鎭重)한 영화일 거라는 선입견도 버릴 일이다. 코언 형제가 만든 영화의 절반 이상이 코미디다.
코언 형제의 입담은 엄지손가락을 세울 만하다. 해고된 CIA 요원의 회고록과 변심한 배우자의 이혼소송과 외로운 사람의 인터넷 즉석 만남과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의 성형수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황들을 씨줄 날줄로 교묘히 짜 맞춰 농담을 하듯 들려주는 솜씨는 일품이다.
상황을 제대로 컨트롤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헛똑똑이들이 좌충우돌하면서 엉망으로 꼬인다. 시체가 늘어가고 상황은 잔인하게 돌아가는데 인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짓을 너무나 당연하게 계속한다. 황당한 상황과 부조리한 현실이 큰 웃음은 아니어도 끊임없이 키득거리게 만든다.
이전 작품들에서 코언 형제는 웃음 뒤에 날카로운 칼을 숨겨놓았다. ‘번 애프터 리딩’도 그럴까.
굳이 찾는다면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영화 말미 해리가 자신을 감시하던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남에게 숨겨야 할 비밀이 있다면 누구나 첩보원이라는 거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게 첩보영화와 뭐가 다르냐는 거다.
또 극중 등장하는 간절한 소망과 목숨을 건 승부수와 생사를 가르는 총격전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그저 웃음거리일 뿐이라는 거다. 카메라를 우주로 줌 아웃해 인공위성 시점에서 지구를 보는 마지막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코언 형제는 ‘읽고 난 뒤에 태워버리’란다. 따지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키득거리다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깡그리 잊으라는 거다.
‘번 애프터 리딩’의 압권은 꽃미남 배우들의 망가지는 연기다.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 브래드 피트.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내내 촐랑대고 호들갑을 떠는 채드 역을 맡아 코믹 연기의 정점을 보여준다. 보기 민망할 정도의 허름한 운동복 차림에 막춤까지 추는 파격변신을 선보인다. /안순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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